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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기사

[평론:강 헌] 불우했던 '70 청년문화 '불쏘시개'

by 팬더54 2008. 11. 7.

불우했던 70년대 청년문화의 '불쏘시개'


'윤형주와 트윈폴리오를 이루어 서울 명동의 쉘부르에서 노래할 때만 해도 가수는 노래만 잘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1969년 미국에서 한대수가 귀국하면서 모든 것은 바뀌었다. 가수가 스스로 노래를 만들어야 되는 시대가 불쑥 시작된 것이다. 나는 서울예고에서 음악을 전공했지만 작품을 써 본 적은 없었다. 처절한 습작의 시간이 계속되었다. 70년 솔로 1집에 담겨있는 단 하나의 자작곡 '창밖에는 비오고요'가 나의 첫 작품이다.'

 조용필과 견줄 수 있는 단 한 명의 가객 송창식. 그가 운명적으로 싱어송라이트가 된 사연은 이랬다. 하지만 산맥과 같은 무게를 지닌 이 도도한 거장의 첫 걸음은 차라리 순박한 것에 가까웠다.


68년 번안곡 꾸러미를 안고 트윈폴리오라는 듀엣으로 모습을 드러내었을 때 그는 통기타 붐의 한 아들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내 데뷔 앨범에 이어 김민기와 공동으로 만든 '내나라 내겨레'와 '밤눈'을 담은 두번째 앨범과 초기의 최대 걸작 '나그네'를 연이어 내놓으면서 한국 싱어송라이터 계보의 거장이 될 것임을 예감케 했다.

 


[75송창식2집]B-4.나그네




'나는 포크뮤지션이 아니다. 당연히 나의 음악은 포크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내가 포크 음악인이었던 것은 '한번쯤'으로 세속적인 성공을 거두기 전의 몇 년 간일 뿐이다. 그뒤부터 나는 그저 대중음악인이었다. 가곡,트로트,펑키록,우리 전통음악 등 모든 음악이 나의 관심사였다. 나는 그 다양한 재료들을 송창식의 음악으로 바꾸어 놓았을 따름이다.'




74년 '피리부는 사나이'와 '한번쯤'의 성공으로 주류의 달콤함으로 기우는가 했으나 75년 영화 '바보들의 행진'의 사운드 트랙을 통해 '왜 불러'와 '고래사냥'을 터뜨림으로써 송창식은 우리의 불우했던 70년대 청년문화의 마지막 불쏘시개가 되었다.

그중에서도 행진곡 스타일의 독특한 드럼 서주로 시작하는 '고래사냥'은 당시 대학의 청년지식인들이 안고 있었던 절망과 희망을 도도하게 포착한 절편으로,권력의 강압적인 조치에 의해 붕괴하게 되는 청년문화의 운명을 극적으로 암시하는 작품이다.

특히 전반부의 서술적인 열 두 마디,'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 뿐이네/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 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앉았네…'는 곧바로 '퇴폐'와 '자학'의 낙인을 받게 되는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대목은 70년대의 내면적인 풍속도를 압축적으로 형상화한다. 강세와 매듭 없이 이어지는 이 지속 선율은 주류 대중음악에 횡행했던 상투적인 운문 형태의 기만에 대한 이 세대 특유의 전복적인 '랩'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Golden Hit Album 아침이슬 / 사랑이야



그리고 그는 '사랑이야'와 '토함산'을 담은 78년 앨범을 신호탄으로 외로운 거장의 반열에 오른다. 그리고 80년 '가나다라'로부터 시작하여 '슬픈 얼굴 짓지 말아요'(82), '우리는'(83)으로 이어지는 제5공화국 시대의 3부작은 그것의 중간 결산이며 그 중에 마지막을 차지하고 있는 앨범은 우리에게 대중음악의 예술적 품격을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송창식을 사랑한 많은 이들 중에 그가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걸고 유신의 암흑기인 78년에 김민기의 지하 불법 작품 '공장의 불빛'을 녹음하는데 자신의 스튜디오를 선뜻 내준 사실까지 알고 있는 이는 아마도 드물 것이다.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의 시간은 지칠 줄 모르는 창작열이 이어졌던 시기다. 끊임없는 영감이 나를 자극했고 나는 그것을 오선지에 옮겼을 뿐이다. 동료 청년 음악인들이 대마초 파동으로 거의 잡혀가던 75년 세밑에 나는 거의 혼자 남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모두에게 불행한 시대였다. 이미 훨씬 전에 음악 활동을 금지당한 김민기의 작업을 도운 것은 나만이 아니다. 그때 우리에겐 공동체적인 어떤 유대가 끈끈하게 있었다.' 송창식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그는 베스트셀러의 스타가 아니라 스테디셀러의 작가이다. 비록 당대의 맞은 편 봉우리인 조용필처럼 오빠부대의 열광을 끌고 다니진 못했지만 70~80년대를 살아남은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또아리 틀고 있는 저자거리의 현자(賢者)였다.


그러나 그런 그의 득음이 그저 누에가 실타래를 풀듯 그저 얻은 것은 아니다. 기나긴 그의 음악 이력을 통해 그는 한국 대중음악사의 내면의 총독부와 힘겨운 투쟁을 거듭했다.
 

나는 초기의 '나그네'에서 중기의 '그대 있음에' 그리고 이 앨범의 두 머리곡을 통해 탁월한 선율과 깊이 있는 가사,그리고 거침없는 절창으로 이른바 '고급음악'의 전당 속에 갇힌 한국 가곡의 본령에 도전했다. 그것은 천시의 시각으로 일관해 온 기득권 세력에 대한 보이지 않는 전복을 꿈꾸는 작업이다.


그 전복의 더듬이는 우리 대중음악의 근원적인 무의식인 트로트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는 이미 초기에 최인호의 노래말을 토대로 '꽃,새,눈물'이라는 트로트의 현대화를 기획한 바 있으며 83년 앨범에 이르러서도 '목련'이라는 간결한 소묘의 세계에 트로트를 끌어들여 천의무봉의 솜씨로 녹여 낸다.


이 5음계 2박자의 애상과 영탄을 극복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이 다음 앨범의 '참새의 하루'에서 집대성된다. 그에게 트로트는 버리고 싶은 유산이 아니라 그 속에 들어가 한계를 돌파해야 할 그 무엇이었던 것이다.


그는 광대가 되기를 억지로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광대가 어떤 모습인지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여기엔 수용자들의 기호에 아부하기 위해 기웃거리는 천박함도 없고 그렇다고 과잉의 자의식에 포박된 현란스런 제스처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송창식 디스코그래피(음반 리스트)의 최대 성과는 한국적 록이 과연 어떤 모습일 수 있을까에 대한 확고한 증명인 86년작 '담배가게 아가씨'일 것이다. 70년대 초반 '밤눈'이나 '새는'같은 노래에서 드러나듯이 자연에 대한 순결한 동경에서 그 기초를 닦은 그의 푸짐한 서정성은 결코 값싸지 않은 해학과 익살을, 또 다른 한편으로는 결코 피상적이지 않는 연가(戀歌)를 분만하게 한다. 별 다른 주석이 필요치 않는 '담배가게 아가씨'가 들려준 이야기의 유쾌한 자유로움과 16비트의 리듬을 마음대로 분절해 나가는 장인정신이야말로 오늘의 대중음악가들에게 사표가 될 만하다.


송창식의 노래들은 험악한 자본주의 문화산업의 자장 안에서도 소외되어 있지 않다. 이것이 송창식의 노래가 가지는 은근한 힘의 원동력이다. 우리에게는 힘차게 펄럭이는 깃발도 필요하지만 끈기 있게 온 겨울밤을 버티는 발갛게 갈라진 장작의 소롯한 불꽃도 또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86년 앨범 이후 그의 침묵은 너무나 오래 동안 이어지고 있다. 경기도 미사리에 가면 매일 밤 그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은 새로이 앞으로 나아가는 영원한 거장 음악가로서의 송창식이다.

 

2003.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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