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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기사

[잡지기사] 학창시절 - '자존심은 상할 수 없다'

by 팬더54 2008. 11. 7.



[내 인생을 바꿔준 사람 - 자존심은 상할 수 없다]
(송창식)


송창식-케사라


송창식 군의 유급 여부를 논의할 예정이니 학교에 나오기 바랍니다.
예고 3학년을 맞이하려던 봄방학 때, 인천 할아버지 댁에 있던 내가 받은 편지였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었지만, 그럼에도 1년만 더 버티면 고등학교를 졸업할 텐데 하는 아쉬움도 동시에 밀려왔다.


1964년 인천에서 중학교를 마친 나는 서울예고를 지원했다. 어릴 때부터 음악에 남다른 소질을 보였던 나는 음악을 공부할 수 있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예고를 선택했다. 그러나 그 선택은 당시 내가 세상 물정을 얼마나 몰랐는지를 여실히 깨닫게 해준 선택이었다. 예비 소집일에 처음 학교에 가보았다. 그때 학교가 이화여고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조회도 이화여고와 함께했다. 55명인 우리 반에도 남학생은 다섯 명 정도뿐인지라 조회시간이면 여학생들 사이에 남학생들이 가뭄에 콩 나듯 서 있었다.


당시 예고에는 필기시험과 실기시험이 있었다. 필기시험은 일반 학교와 다를 바 없었는데 문제는 실기시험이었다. 실기시험은 학생들 중에서 개인 레슨을 받은 사람에 한해 치러졌다. 개인 레슨 선생님이 추천을 해야만 실기시험을 볼 자격이 주어졌다. 그러나 나는 실기시험을 볼 수가 없었다. 나는 1천 원 정도 드는 개인 레슨비를 - 다른 학생들은 보통 1만 원 내지 10만 원까지 레슨비를 지불했다 - 를 마련할 수 없었다.


나는 한국전쟁 때 아버지가 전사하신 후, 인천에 있는 할아버지 댁에서 자랐다. 그러나 할아버지 댁은 정부에서 배급하는 밀가루를 받아 생활을 연명할 정도로 가난했고 어머니마저 어느 날 가출하고 말아, 경제적으로 달리 기댈 데가 없었다. 가정 형편이 이렇다 보니 내게 급한 것은 먹을거리였다. 예고에 입학한 후 나는 학교 창고에서 잠을 잤다. 그곳에 풍로를 마련하고 밥을 직접 해 먹었다. 국가유공자 자녀 장학금과 학교 장학금이 있었지만, 그 돈은 고스란히 배고픔을 해결하는 데 들었다. 때로는 학생들이 도시락을 두 개 가져와 내게 건네고는 했다.


실기시험을 볼 수 없으니 학교 성적은 불 보듯 뻔했다. 단지 고등학교 졸업장이라도 받고 싶었지만 다시 3학년 과정을 어떻게 다녀야 할지도 막막해, 나는 담담히 유급 조치를 받고 말았다.


유급 후, 음악에 대한 집착은 엄청나게 커졌다. 일곱 살 때 직접 작사를 했고, 중학교 때까지 인천에서 열리는 콩쿠르 대회에서 상을 휩쓸 정도였지만, 음악에 대한 이론은 전무했다. 그런데 음악에도 체계적인 이론이 필요하다는 것을 예고 2년 동안에 배운 것이다. 유급 후 혼자 이론적인 음악을 공부했다. 원서가 많아 사전을 뒤적거리면서 뮤직자만 들어가는 책이라면 모조리 구해 읽었다.


유급된 후에도 나는 대학에 들어간 예고 때의 친구들과 어울렸다. 홍익대에 다니는 친구들이 많아 강의도 몰래 듣고, 잔디밭에 앉아 기타를 배우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가난으로부터의 탈출은 힘들어, 서울 시내 곳곳에서 노숙했다. 친구들에게 차비 좀 달라고 해 얻은 돈으로 먹을거리를 마련했고, 웬만한 거리는 걸어다녔다. 한번은 수유리에 사는 친구 집에서 잠을 잔 후, 택시로 40여 분 걸리는 홍대까지 걸어간 적도 있었다.


67년 홍대 캠퍼스에서 기타 치고 놀다가 우연히 라이브 카페 쎄시봉을 알게 돼 팝송을 시작한 게, 가난으로부터 탈출하는 동아줄이 되었다.


가난 속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던 그 시기에, 나는 자존심은 상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상하는 것은 오기일 뿐이지. 자존심이 아니었다. 그런 것을 보고 불가에서는 금강이라고 하던가. 부자들만이 입학했어야 했던 예고에,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던 내가 입학해서 겪은 일들은, 내 마음 안에서 원망도 애정도 거둬가버렸다. 지금도 사람들에 대한 원망도 애정도 없이 담담한 마음을 유지하고 산다.


내 삶을 유지하는 일관된 평정심은 예고 입학과 유급 등이 만든 것이니, 내 삶에 영향을 준 어떤 누구보다도 기억에 남는 한 시기가 아닐 수 없다. 내 인생을 바꿔준 사람에 사람보다 그 시절을 말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가나다라마바사’ ‘참새의 하루’ 등 많은 노래를 남기고 75년 국내 최고 가수왕을 차지한 송창식님은 요즘엔 미사리 한강 조정경기장 근처에 있는 한 카페에서 라이브 공연을 갖고 있다. 님은 작사를 제외하고는 자신이 직접 쓴 글을 남기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해, 이 글은 송창식님의 구술을 노정환 기자가 정리했다.


※출처: 월간 작은이야기(
http://www.smallstor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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