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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기사

[평론:박유림] 70년대부터 현대까지 통키타 문화

by 팬더54 2008. 11. 7.
[평론:박유림] 70년대부터 현대까지 통키타 문화

대학생활의 상징 ― 통키타


[2012년 6월 예술의 전당 공연중  송창식,제이레빗-하얀손수건,웨딩케익]
 
통키타란 무엇일까?
여섯줄의 악기.. 올림구멍을 통해 빠져나오는 소리.. 포크음악.. 김광석.. 대학문화... 통키타라하면 많은것을 떠올리게 된다. 기타의 역사는 한마디로 클래식 기타의 역사라고 할 수 있겠다. 통키타 또는 일렉기타(Electric guitar)는 시대의 부산물이며 특히 서민들 즉 대중들이 노래와 춤을 즐길 때 흥겹게 해주기위한 반주악기로써 발전해 왔기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통키타(Acoustic guitar)와 일렉기타(Electric guitar)가 훌륭한 연주가들과 작곡가들에 의해 독자적으로 연주용 악기로 발전하였다.


기타는 크게 머리(Head), 목(Neck), 몸통(Body)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기타의 종류로는 어쿠스틱, 일렉, 베이스, 클래식 등으로 크게 나눠진다. 그리고 기타는 여섯줄로 된 악기이며 베미스기타는 네줄로 이루어져 있다. 위에서 언급된 대로 줄을 튕겨 몸통에 있는 울림구멍을 통해 소리가 나오는 아주 과학적이고 놀라운 악기라고 할 수 있겠다. 기타에 대해서 얘기를 다 하자면 오늘의 얘기는 끝도 없이 길어질 것 같다. 그래서 오늘은 그중 70년대 통기타 문화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대한민국 통기타 문화에 대해 얘기해 볼까한다.


올해 2001년은 한국의 모던 포크, 곧 통기타 음악의 32주년이 되는 해이다. '하얀손수건', '웨딩케익' 등을 담은 최초의 통기타 앨범인 트윈 폴리오(송창식과 윤형주)의 데뷔 앨범이 69년에 발표되었으며 최초의 싱어송라이터라고 할 수 있는 한대수가 귀국 콘서트를 가진 해가 또 69년인 탓이다. 통기타의 전성기 70년대 명동거리에는 통기타 음악과 청바지에 생맥주가 넘실거렸다. 그 통기타 문화는 전국곳곳으로 대중 속에 확산 되었으며 그것은 대학문화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캠퍼스의 잔디위에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는 모습은 대학문화의 대표적인 모습이라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과 앰프를 통한 강렬한 사운드의 비트있는 음악들이 판을 치고 있는 지금도 대학생활이라면 통기타와 청바지를 떠올리는게 다반사이다. 그러나 현실은 컴퓨터 프로그래밍과 앰프를 통한 전기적인 증폭 음향이 세기말의 음악 상황을 지배하고 있다. 통기타와 하모니카 같은 간단한 자연음으로 진솔하게 인간과 세계에 대해 노래하는 모던 포크 음악은 완연히 비주류의 변방으로 밀려난 것처럼 보인다. 88올림픽 이후 한국의 대중음악은 발라드와 댄스뮤직이라는 양대 문법의 일방적인 지배 아래 놓이게 되면서 음악산업은 십대 취향의 음악으로 이동했고, 70․80년대의 청년문화와 대학문화의 주축이자 상업적인 영역에서도 주류를 장악했던 한국 모던 포크는 90년대 통키타 음악의 기수라고 할 수 있는 김광석의 사후 급격한 퇴조를 경험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시장의 가시적 외양이 한국 포크음악의 사멸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20대에서 40대에 이르는 통키타음악 수용세대들은 여전히 광범하게 잠복하고 있으며 이들 세대는 십대들의 컴퓨터 음향이나 격렬한 록음악의 비트보다는 어쿠스틱(Acoustic)한 사운드에 기반한 음악을 더욱 선호하는 취향을 지니고 있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통키타 붐은 청바지와 생맥주로 표상되는 청년문화 아이콘과 더불어 급속히 세력을 넓혀 나갔다. 박정희의 영구 집권 욕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하던 71년초 라나에르스포의 '사랑해'와 은희의 '꽃반지 끼고'의 단순한 아르페지오의 선율은 대학가의 담을 넘어 시장으로 진군해 갔으며, 그해 여름 그 뒤로도 오랫동안 청년문화의 송가가 된 '아침이슬'이 김민기와 양희은 짝에 의해 발표되었다. 그리하여 통기타 음악은 김정호와 송창식, 이장희와 어니언스 같은 포크계열 스타들에 의해 70년대 중반 주류의 최정상에 등극하는 열광적인 에너지를 분만했다.


하지만 이 절정기는 너무나 아쉬울 정도로 짧았다. 세력은 이 젋은 난동(?)을 사시의 눈으로 못마땅해 했으며 유신정권은 75년 가요 규제 조치와 대마초 파동을 통해 통기타 음악의 날갯죽지를 군화발로 꺾어 버린다. 세상은 다시 평온한 복고의 흐름으로 돌아갔으나 사랑과 자유를 향한 청년 지식인들의 복화술은 70년대 후반의 암흑기에도 여전히 계승되었다. 진지한 자연친화력을 오선지에 옮긴 이정선, 질박한 전통적 서정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정태춘, 은둔주의의 고요함을 펼친 조동진 같은 거목들이 전시대의 영광을 내면적으로 성숙시켰다. 이는 80년대 한국 포크음악의 백가쟁명을 예견하는 징후였다.


광주라는 현대사의 분기점을 통과하며 우리의 포크음악은 두 갈래의 큰 물줄기를 그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나중에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라는 대중적인 포크그룹을 낳게 되는 비판과 투쟁으로서의 노래운동의 흐름이고, 나머지 하나는 '따로 또 같이'와 '시인과 촌장'으로 대표되는 포크음악의 예술화 움직임이다. 앞의 흐름은 김민기의 비판적 문제의식을 현실 속에서 더욱 끌어올림으로써 포크음악이 진정한 시민정신 음악이라는 사실을 거리와 학교와 공장에서 극적으로 증명하였다. 그리고 예술적 완전주의를 향한 후자의 그룹은 소극장과 앨범 그 자체의 완성도를 통해 서구 대중 음악에 경도되어 있던 젊은 마니아층까지 포섬하며 우리 음반 시장에서 한국 대중음악의 헤게모니 장악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비록 시각매체의 일방적 독주와 흑인 계열의 음악이 빅뱅을 일으킨 90년대에 이르러 포크음악 진영은 이전 시대의 영광을 유지하는데 다소 힘이 벅찬 모습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포크음악은 80년대 노래운동 출신의 김광석과 안치환, 그리고 권지원 같은 이들과 티없이 맑고 투명한 서정성을 바탕으로 다양한 음악적 개성을 구사한 동물원, 여행스케치, 한동준, 장필순, 일기예보 같은 후계자들을 낳으며 이제는 새로운 세기의 반전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아울러 많은 언더들의 활동도 주목이 된다. 70년대처럼 아직도 많은 대학생들이 통기타 문화를 이어가는 것도 그 주목 중 하나이다.


우리 여수대학교에도 많은 활동을 하고 있는 통기타 동아리 코러스가 있다. 이들은 많은 학우들을 위하여 무료로 공연을 하고 있으며 통기타 문화의 전파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통기타 음악을 통해 그동안 상실해왔던 음악과 인간의 의사소통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영원한 비판적 지성의 음악이자 순수 자연의 음악인 통기타 음악은 인기가 시들어버린 어제의 음악이 아니라 새로운 밀레니엄을 이끌어갈 주요한 선두주자 중의 하나인 것이다. <박유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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