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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기사

[신문] 1991년 한국일보 문화인/예술인

by 팬더54 2008. 11. 7.

한국일보 1991년 5월 11일

문화인 / 예술인 - 가수 송 창 식


한국전쟁 직전, 어린 송창식이 없어지면 어머니는 늘 라디오소리 나는 곳에서 그를 찾곤했다. 결국 송창식(44)은 라디오뿐 아니라 TV, 대학캠퍼스, 술집 어디에서건 자신의 소리를 울려내는 남달리 유명한 가수가 되었다.


부침이 심하고 명이 짧은 대중가수들의 세계에서 그는 20여년을 꿋꿋이 버텨왔으며 사람들은 그의 노래를 들으면서 송창식이란 이름석자를 자연스럽게 마음속에 떠올릴수 있게 되었다. 독특하게 구축된 그의 음악세계는 특정계층의 감정 촉발을 강요하지않는 포괄적 성향을 보였고 대중가요들이 심심찮게 휘말려 들어갔던 저급, 퇴폐, 매판성 시비로부터 자유로울수 있었다. 75년 순전히 [러브송]으로 작사작곡, 영화 [바보들의 행진]에 삽입했던 [왜불러]는 영화주인공이 공권력에 의해 머리 깍이는 장면과 겹쳐 오히려 대학가에서는 사회상을 반영하는 노래로 비쳐지기까지 했다.


""송창식의 남다름은 한국인의 노래를 부른다는데있다. 81년 재일교포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기 위해 어려운말만 골라 넣어 만들었던 [가나다라]는 박자를 제외한 가사와 곡의 분위기가 상당히 국악에 접근해있다. 87년 발표된 [무제1]은 가사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아~]라고 들리는 소리로 신과 인간사이를 매개하는 신적 상황을 전달한다. 국립국악원 이승렬원장은 그를 이렇게 평가한다. "송창식이 만들어 부르는 노래가 한국적 세계를 추구하는 단계에 있는지, 아니면 달성한 경지에 들어섰는지는 지금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확실히 국악을 현대적으로 소화해내고 있으며 국악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수준은 최상급이다. 일반적의미의 대중가수 범주로부터는 벗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송창식의 음악세계는 성악, 팝송, 국악적요소가 가미된 대중가요, 그리고 현재 위치에 이르기까지 두세번 방향전환의 계기를 거치게 된다.


47년 인천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전쟁으로 아버지를 여의고 국민학교때 어머니가 복잡한 집안사정으로 집을 나가는 바람에 누이동생과 함께 할아버지 밑에서 어렵게 소년시절을 보내야했다. 가난하고 수줍음을 많이타 또래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그 외로움과 서러움을 그는 삼촌이 사다준 헌 하모니카를 입술이 터져라 불면서 달랬다. 당시 유행곡은 거의다 외우다시피 했다.


인천중학졸업후 음악을 더하고싶어 63년 성악부문으로 서울예고에 입학했다. 서울예고시절 송창식은 조금씩 서양음악의 맛을 터득해나갔으나 가난이 주는 불편함을 뼈저리게 느껴야했다. 개인레슨비를 마련하지 못해 지도교사를 만나지 못했고, 그래서 학교규칙상 지도교사가 추천하는 실기시험자격을 얻지 못한채 1학년 2학기부터 계속 실기시험 0점을 감수해야했다. 3학년 진급때는 유급도 아닌데 반편성을 받지못하는 어중간한 처지에 놓이기도 했으나 이론, 작곡, 시창 분야에서 음악적 기반을 닦으며 음대진학을 꿈꾸었다.


그러나 고교졸업이 가까워지면서 송창식은 음악행로의 방향을 수정한다. 외국의 대가들로부터 시간제 레슨을 받는 부자집 친구들과 자신의 처지를 비교할수있는 현실인식의 눈을 뜨게 된것이다. 그는 [어차피 서양 본고장의 음악인들을 사사하지 못할바에야 대학에 가봤자 나는 영원히 가짜로 남는다]고 자각하고 과감히 음대진학을 포기한다. 송창식은 1년여동안 떠돌이생활을하며 한국의 클래식음악 전공자들보다 자기가 더 잘할수있는 분야를 찾아다녔다. 자연스럽게 기타와 팝송을 접하게 되었고 이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67년 무교동의 음악감상실 [세시봉]에서 열린 [대학생의 밤]에 가짜 대학생으로 참가한 송창식은 당시 연세대의예과 2학년이던 윤형주를 만나고 이듬해 봄 보컬듀엣 [트윈폴리오]를 결성한다.


"윤형주의 학업문제로 69년말 해체하기까지 [트윈폴리오]는 [웨딩케이크] [하얀손수건]등 번안외국가요들을 히트시키며 통기타, 청바지, 맥주문화를 선도, 청년층으로부터 폭발적 인기를 얻었다. 이때 만난 이장희, 김민기를 송창식은 아직도 당대 최고 가수로 꼽는다. "이장희는 선구적 록스타일에 레오나드 코헨 처럼 가사에 많은 의미를 두려했다. 그는 팝송의 정신을 이해하고 있었다."


""고등학생이었던 김민기는 곧 서울대에 입학, 학생운동에 간여하며 운동권노래를 만들기 시작한다. "윤형주가 고등학교 후배라고 민기를 데리고 왔을때 한눈에 탁월함을 알아볼수 있었다. [친구]와 [아침이슬]은 아카데믹한 포크송의 정수이다."


70년 솔로가수로 전향한 송창식은 [내나라 내겨레] [딩동댕 지난여름] [꽃보다 귀한여인]등을 작곡 발표했고 작사에도 본격적으로 손을댔다. 정형화된 형식에서 벗어나 지성보다는 본성에서 우러나온다는 점에서 팝송의 가치를 확신한 시기였다.


""그러나 서양음악을 하는 동양인의 한계 때문에 그는 늘 개운치 않았다. 그리고 73년, 6개월의 군복무를 위해 입대했을때 두번째 방향전환의 계기를 맞는다. 부대에서 우연히 TV를 통해 아마추어 국악인들의 연주장면을 보고 저절로 좋고 나쁘다는 의견이 생긴것이다. 지루하고 시끄럽게 여겨지던 국악에대한 최초의 의견이였다. 송창식은 그때를 기억하며 "갑작스런 돌출사건이 아니다. 그동안 내 몸속에 축적된 한국적 음악감각이 발현되었을 뿐이다." 라고 말한다. 어쨋든 이때의 도약이후 그의 노래에는 국악적요소가 수용된다. [피리부는 사나이] [왜불러] [고래사냥] [새는] [토함산] [가나다라] [에이야홍 술래잡기] [선운사]등에서 그런 부분들을 발견할수 있다. 그러나 송창식을 대중스타로 만들어준 [한번쯤]에는 국악적 요소가 한음절도 없었다. 군제대후 가수로서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철저히 대중취향에 맞는 곡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창 성가를 올리던 77년 송창식은 예비군훈련불참으로 3주간 구치소에 수감된후 1년간 활동금지를 당하면서 그동안 음악에 대해 가졌던 의견을 종합할수 있는 시간을 얻는다.


"""흐름의 연속인 동양음악이나 분할, 통합의 연결인 서양음악이나 그 본류는 소리이다. 소리를 고급, 저급으로 나눌수는 없어도 진짜, 가짜로 구별할수는 있다. 서양음악을 한국사람이 흉내만 낸다면 가짜소리가 나온다. 그것은 기법 이전에 몸과 정신의 문제이다."


80년대 들어 송창식은 꽹과리, 장고 등을 배우고 단전호흡을 익히는등 꾸준히 [한국적인 것]을 모색했다. 국립국악원, 중앙국악관현악단, 시립국악교향악단, KBS오케스트라, 서울시립교향악단 등과 공연하면서 [슬픈 얼굴짓지 말아요] [우리는] [참새의 하루] [담배가게 아가씨] [푸르른날]등 대중가요를 꾸준히 발표해왔다. 그러나 87년 발표된 [참새의 하루]앨범 이후 새앨범은 나오지 않고있다. 그에게는 이제 모든소리가 이미 음악이므로 절박하게 노래를 만들어낼 필요를 못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경기도 퇴촌면에 살고있는 송창식의 요즘하루 일과는 아주 단조롭다. 낮 2, 3시께 일어나면 대개 새로지어 옮길 집의 공사장을 둘러보고 밤에는 서울에 있는 밤업소 2곳을 돈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특별히 하는 일없이 꼬박 밤을 새우고 아침 5, 6시께 잠이든다. 20여년간 길들여진 습관이다.


김병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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