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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기사

[평론] 송창식의 말은 한편의 ‘강의’였다

by 팬더54 2008. 11. 7.

스타들이 남긴 말… 말… 말… [주간조선 2004-03-10 18:31] 
 

“뛰어난 가수들, 알고보니 철학자였다”
어느 분야든 그렇지만, 오랫동안 한 부문에서 활동해 금자탑을 세운 거장들을 만나면 자신만의 견고한 철학을 소유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70년 역사의 대중가요계를 수놓은 스물여섯 명의 거물과 만나 인터뷰하면서 놀라웠던 것은 그들이 단지 노래하는 가수나 연주자가 아니라 ‘예술철학가’라는 사실이었다. 맹세컨대 가수들의 답변이나 발언 가운데 수정하거나 윤색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그들이 한 말을 그대로 적어 내려갔을 뿐이다. 하기야 인터뷰 내용을 정리하면서 필자도 놀랄 만큼 그들의 논리는 정연했고 언어구사도 빼어났다. 먼저 그 중 몇 가지를 살펴보자. “여가수는 여자로서 아름다움을 잃으면 안 된다. 아름다움을 지키려면 하고 싶은 것을 억누르고 참는 자세가 요구된다.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게 없다!’는 게 내 신조다.”(패티김)
“문화는 멀티가 아니면 죽는다. 음악은 메뉴판과 같다. 고루고루 음악마다 전문가가 있어야 한다.”(신중현) “모든 예술행위는 지루함을 준다면 죄다. 음악은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영역이므로 더 실험과 도전이 필요하다. 내 경우도 ‘물 좀 주소’ 하나 가지고 계속할 수 없지 않은가.”(한대수)
“내가 대중에게 위로를 준 게 아니라 팬들이 날 위로해준 것이다. 하지만 음악으로 인생을 다해도 대중에게 진 빚을 다 갚지는 못할 것이다.”(심수봉)

스타들, 대부분 눌변 아닌 달변가 솔직히 그들을 만나기 전에는 음악은 빛나더라도 실제 언변은 어눌할 것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다. 어눌하기는커녕 대부분이 달변이었다.
양희은과 배철수는 방송프로 진행자답게 능수능란한 화술을 자랑했고, 김창완은 언어 자체가 고급스러웠으며, ‘맨발의 디바’ 이은미는 듣는 사람을 홀리게 할 만큼 메시지 전달력이 뛰어났다.

“요즘 트로트로 데뷔하는 가수들은 하나같이 뭔가 도달하지 못한 상태다. 트로트는 아무렇게나 가볍고 천하게 부를 노래가 아니다”라는 주현미의 조리 있는 관점도 인상적이었다. 오랜 경력이 가져다준 너그러움 때문인지, 민감한 질문에 대해서도 그들의 답변에는 여유가 넘쳤다.
패티김은 소문으로 떠돈 이중국적 문제에 대해 기다렸다는 듯이 묻기도 전에 거침없이 털어놓았고, 심수봉은 그의 발목을 붙잡은 동시에 신비로운 이미지도 가져다준 궁정동 사건에 대해 “나를 짓누른 무시무시한 짐이었기 때문에 이제는 훌훌 털어내야 한다”며 차분하게 당시를 술회하기도 했다.

기획사와의 관계 등을 지나치게 의식해 까다로운 부분을 회피하려는 요즘의 젊은 가수들과는 판이했다. 확실히 거장은 뭔가 달라도 크게 달랐다. 고매한 품격과 깊이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고 어떤 경우에는 한없이 인간적이었다.

예를 들어 송창식의 경우, 그것은 인터뷰가 아니라 필자에게 제대로 음악을 가르쳐주려는 한편의 ‘강의’였다. 거의 도인의 경지여서, 던지는 말의 의미를 따라가는 데도 진땀이 날 정도였다. 양희은은 과거 일그러진 가정사를 회고하는 대목에서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해 분위기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역시 음악가는 순수하다는 점을 다시금 일깨웠다. 또한 신승훈은 녹음실에서 이것저것 먹어 살이 쪘다며 만나기를 꺼렸지만 막상 인터뷰에는 “며칠 간 열심히 운동했다”며 날씬한 모습으로 나타나 스타로서의 철저한 준비자세를 보였다. 그들을 만난 시점은 2002년 8월부터 2003년 12월까지 공교롭게도 가요계가 극심한 침체에 시달리고, 음악가라기보다는 순간의 인기에 영합하는 ‘연예인들’이 판치는 곳으로 변질되어가고 있는 때였다. 하지만 그들의 가슴은 따뜻했다.
어린 후배들은 너그럽게 감쌌으며, 그들이 진지하게 음악에 매진하기만 한다면 미래는 분명 희망적이라는 낙관을 피력했다. “지금의 가수는 비주얼 측면, 외모, 춤, 노래 실력이 모두 요구된다.

그런 변화를 고려하면 후배가수들이 오히려 잘한다고 생각한다.
”(조용필) “요즘 가수들을 보면 음악 얘기를 더 많이 한다. 우리 때보다 낫다.
”(이정선) “노래란 배우는 게 아니다. 배울 게 있다면 도리어 후배가수들에게 배워야 하는 것 아닌가?
”(이선희) 물론 신세대에게 자신들이 잊혀져버린 우리 대중문화의 고질적인 ‘단절’ 현상과, 여전히 음악인들에게 정당한 대우를 해주지 않는 풍토가 아쉬웠던 탓인지 절절한 말도 많았다.

“연예인이 아닌 뮤지션이 되길” “우리 대중은 기다림이 없다. 그들은 바람과도 같다. 바람은 잡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한 ‘작은 거인’ 김수철,
“음악의 기능은 대중과 뮤지션의 상호작용이다. 그게 안 되면 음반은 낼 수 없는 것”이라고 한 ‘산울림’의 김창완,
 “우리 한국에는 대단한 원석(原石)이 많음에도 그것을 가공해내는 환경이 되지 못하고 있다.

현재 많은 다이아몬드들이 썩고 있다”고 안타까움을 표한 강산에의 말은 참으로 가슴 아픈 것이었다. ‘라이브의 왕자’ 이승철은 “지금은 가수가 아니라 연예인을 목표로 한 후배들이 너무도 많다.

스타가 되기 위해 음반을 내고, 어느 정도 알려지면 연기 등 다른 분야로 옮겨가는 것이다. 연예인이 될 생각을 하지 말고 뮤지션이 되라고 권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아마 후배가수들은 뜨끔할 것이다.

그들과의 대화를 정리하면서 우리에게는 제대로 된 음악자료가 없다는 생각에 부끄러웠다. 대중가요 현대사의 줄기를 잡아줄 어떠한 책도 없고, 인터넷 정보는 턱없이 부실한 실정이다.
그들을 직접 만나 증언을 기록하는 게 가장 믿을 만한 자료가 되는 셈이다. 때문에 가능하다면 다음번에는 김민기, 조동진, 인순이, 전인권, 서태지를 꼭 만나 인터뷰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마지막으로 송창식을 만났을 때 우선 글을 써야 한다는 조급함 때문에 중도에 그의 말을 끊고 질문을 들이댄 것은 돌이켜보면 큰 실례이자 실수였다. 그냥 ‘강의’를 계속 들었어야 했다. 그랬으면 더 자세하고 소중한 사료를 챙길 수 있었을 것이다. 정말 후회막급이다.

임진모 음악평론가
■‘우리대중음악의 큰별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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