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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기사

[기사] 東海의 고래

by 팬더54 2008. 11. 7.

[만물상] 東海의 고래


[조선일보 2004-04-09 18:07]




지금의 40대들이 스무 살 무렵 막걸리나 소주 한잔 하면 즐겨 부르던 노래로 송창식의 ‘고래사냥’이 있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로 시작해서,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하며 하늘이 떠나갈 듯 목청을 높이면 신기하게도 가슴에 응어리졌던 까닭 모를 슬픔과 우울과 분노가 일순 사라지곤 했다. 가사 하나하나가 의미심장했지만 그중에서도 부를 때마다 묘한 설렘을 안겨주었던 구절이‘신화처럼 숨쉬는 고래 한 마리’라는 부분이었다. 절벽과 같은 현실에 절망하며 탈출을 꿈꾸는 숱한 젊음들에게 동해바다의 고래는 원시의 생명력이요, 해방 그 자체였다.


동해의 고래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면 반구대의 수천 년 전 신석기 시대 암각화에도 그려져 있다. 늑대 사슴 멧돼지와 함께 고래가 무려 40여 마리 그려져 있는 걸 보면, 신석기인들에게도 고래는 어떤 상징적 의미를 가졌던 모양이다. 고래 종류에 따라 물을 뿜어내는 모양까지 다를 정도로 정교하고 사실적으로 그렸는데 그중에 이마가 박치기왕처럼 뭉툭하게 그려진 놈이 두 마리 있다. 향(香)고래다.


“축축하게 가랑비 내리는 11월처럼 내 입가에 우울한 빛이 떠돌 때,…내 영혼의 괴로움으로 거리로 뛰쳐나가고 싶을 때, 나는 빨리 바다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안다.” 고래에 맞서는 사나이의 집념과 증오를 그린 허먼 멜빌의 고전 ‘백경(白鯨)’은 이렇게 시작된다. ‘문학사상 가장 거친 사냥’으로 꼽히는 이 소설에서 주인공 에이헙 선장이 목숨을 걸고 쫓는 게 바로 흰색 향고래, 모비딕이다.


이 향고래가 70여년 만에 동해바다에 돌아왔다고 해서 화제다. 엊그제 경북 포항 구룡포 앞바다에서 어미와 새끼 등 8마리의 향고래 가족이 국립수산과학원에 발견돼 사진까지 찍혔다. 향고래의 이마에 있는 두 개의 거대한 주머니 중 하나에 가득찬 향유는 샤넬 5번 향수의 재료로 사용될 정도로 질이 좋아 오래전부터 포경선들의 좋은 공격 대상이었다.


물론 에이헙 선장이 광기의 고래잡이에 나선 것은 이런 세속적 가치 때문이 아니었다. “갑자기 마치 갈매기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공기를 가로지르며 울려왔다. 저기 그가 울부짖고 있다! 마치 빙산처럼 등이 굽은 것 말이다. 저건 모비딕이다!” 에이헙에게 고래는 이겨낼 수 없는, 무시무시하고 영원하며 찬란한 자연의 총체였다. 70년대의 젊은이들이 ‘아침에 일어나면 모든 게 잊혀지’더라도 생각난다던 그 ‘조그만 꿈’ 하나처럼 말이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김태익·논설위원
tikim@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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