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가객 송창식님을 좋아하는 사람들
평론&기사

[방송자료] 송창식의 음악세계(강릉MBC FM 2004년8월 10일 방송자료)

by 팬더54 2008. 11. 10.

 

소  개
 
국민가수라 불리우는 송창식씨 포크의 태동기부터 현재까지 30여년동안 걸어온 그의음악세계는 성악, 팝송, 포크, 트로트에서부터 국악적 요소 가 녹아든 대중가요에 이르기까지 실로 형형색색의 음악을 한 송창식씨에 대해서 알아 보기로 하겠읍니다..

가수들 조차도 노래잘하는 가수로 인정을 받았던 송창식. 그가 들려준 서정적이고도 신명나는 노래가락들에 자유로왔던 70년대 젊은이들은 없었다. 명 짧기로 유명한 대중가요계에서 그의 질긴 음악생명력은 무엇보다 더 모든 계층을 포용한 편안한 노래가락에서 얻어졌다. 또한 바보스럽게 히죽 웃는 모습은 그에게 쉽게 다가설 수 있을 것 같은 친숙함을 주었다. 1948년 2월 20일에 인천에서 태어난 송창식씨는인천중학 2학년때 영화 <토스카>를 단체관람을 했는데 클래식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으며 성악가가 
되기로 결심했다.1년후 중3때는 경기음악콩쿠르 성악부문1등을 차지할 만큼 재능을 보였다. 제물포고를 지원하라는 집안 어른말을 거역하고 서울예고 성악과에 수석입학했다. 군경 유자녀 장학금과 심부름 아르바이트로 근근히 학교를 다녔지만 개인 레슨비를 낼 수가 없어 성악을 포기했다. 작곡을 해보려 화성학공부를 해보았지만 가난은 모든 것을 좌절하게 만들었다. 실기시험을 치르지 못해 2학년을 마치자 날아온 유급통지서. 늘 우수한 학업성적을 내던 송창식은  가출을 했다. 만화가게 점원, 국화빵집 심부름꾼 등을 닥치는 대로했다. 끼니를 걱정하는 밑바닥 삶이었다. 고3이된 친구들이 공부하던 화실에서 잡일을 하며 기거하던 송창식은 친구들의 여름방학때 따라나선 무위도 여행길에서 또한번 반전의 기회를 맞았다. 서울에서 온 몇팀의 학생클럽중 60년대 당시로서는 보기드물게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대학생이 있었다. 성균관대생 서유석이었다. 달콤한 통기타울림으로 학생들을 사로잡는 포크가락에 송창식은 포크음악에 매료 되었다



 활  동


홍대 미대로 진학한 친구 염동진을 따라 수업은 물론 교정잔디밭에서 기타를 퉁기며 소일했다. 자신조차 홍대생으로 착각했을 정도이니 당시 언론에 가끔 학력이 홍대졸업으로 나왔던 것은 이 때문. 제법 수준급의 기타 연주실력을 뽐내며 노래하는 송창식은 홍대의 명물이 됐다. 눈여겨보고 있던 무교동의 유명음악감상실 세시봉에서 MC를 맡았던 공예과 2학년 이상벽은 출연을 교섭해주며 인생의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수많은 학생가수들과 교분이 생긴 송창식은 학생가에 제법 인기가 있던 연세대생 윤형주, 이익근을 졸라 세시봉트리오를 결성했다. 활동시작 몇 달만에 이익근이 군입대를 하자 68년 윤형주와 남성듀오 트윈폴리오를 결성, 지금껏 애창되는<하얀손수건>등 주옥같은 번안곡들을 발표하며 대중들속으로 힘찬 첫발을 내딛었다.

2년남짓 활동한 트윈폴리오는 윤형주의 학업문제로 팬들의 아쉬움속에 1969년 12월 종지부를 찍었다. 짧은 기간에도 불구, 폭넓은 대중적 사랑을 얻은 것은 타고난 노래실력외에도 여성취향의 달콤한 멜로디가 한몫 거들었다. 송창식은 한대수, 김의철, 김민기, 양병집 같은 우직하고 사회참여적인 정통포크가수는아니었다. 누구나 쉽게 빠져들 수 있는 달콤한 사랑노래를 부르는 상업포크가수였다. 솔로데뷔음반 <송창식 애창곡모음-유니버샬,K-APPLE36,71년3월>은 1년여동안 불렀던 애창곡 모음집. 자작곡인 '창밖에는 비오고요'등 수록된12곡들은 대부분 애절하고 감상적 분위기의 노래들이었다.

김희갑 작ㆍ편곡집으로 발표된 <송창식애창곡모음2집-유니버샬,K-APPLE56>엔 <비와 나> <내나라 내겨레> <송창식 자장가>등 창작곡이 3곡이나 수록되어 있다.

윤형주에게 먼저 선사했던 <비와 나> 그리고 김민기가 작사한 애국가요 2탄 <내나라 내겨레>는 지금껏 불리어지는 국민가요급노래. 애틋한 옛추억에 잠기게 하는 마력을 지닌 <상아의 노래>는 대학가는 
물론 중고등학생들에까지 널리 불리어졌다.

2집발표와 더불어 봇물 터지듯 쏟아져나온 <비의 나그네> <딩동댕 지난여름> <애인>등 주옥같은 노래들은 가히 송창식 돌풍을 일으켰다.



 음  악


72년 6월 미국작곡가 벤 오클랜드는 내한중 우연히 파티석상에서 <세노야> <창밖에는 비오고요>등을 부르는 송창식의 노래를 듣고 감탄했다. 송창식의 모든 음반을 구해 들을 만큼 매료된 그는 송창식의미국진출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도 했다.

75년은 송창식의 가수인생중 최고의 해. 더욱 대중적인 음악적 변신을 감행했다. 이때 발표한 <고래사냥> <왜불러> <피리부는 사나이> <사랑하는 마음>등은 제10회 MBC10대가수가요제에서 그를 가수왕으로 등극시킬만큼 폭발적 반응을 불러왔다.

그러나 가요정화운동으로 <고래사냥> <왜불러> 정미조가 부른 <불꽃> 등 많은 곡들이 금지족쇄를 차기도 했다.74년 피리부는 사나이로 대한민국 방송대상 남자 가수수상 및 MBC 10대 가수상 최고인기가요 작사상 및 가수왕상을 수상했고, TBC에서도 7대 가수상을 받았다. 75년 에도 MBC 10대 가수상과 TBC 7대 가수상을 받았을 뿐아니라 제1회 홍콩 가요제에 초청 가수로 초대되었다. 
78년 제1회 MBC 서울 국제가요제에서 토함산으로 우수가창상을 받았고, 
79년에는 한일 문화교류협회 초청으로일본 공연을 갖기도 했다. 또 같은 해부터 연속 3년 동안 계속해서 MBC10대 가수상을 받았다.

77년 9월 고교동창이자 스튜어디스 출신 쌍둥이 한성숙과의 결혼으로 송창식은 <속 별들의 고향> 영화음악 작곡에 전념을 하며 안정을 찾았다. 이 당시 군에서 제대, 완구공장 창고직원으로 일하다 해고당한 김민기에게 작업실을 거리낌없이 내줘 운동가 '공장의 불빛'을 탄생시킨 일화는 유명하다. 또한 트로트록으로 불렀던 '왜불러'가 79년 일본에서 음반으로 발매됐다. 이후 81년 우리가락에 심취하여 농악과 록을 접목한 <가나다라>를 발표하며 MBC인가가요차트 1위를 4주연속 차지하고 82년 제1회 가톨릭가요대상을 수상하는 저력을 발휘했다. 단전호흡과 도사상에 빠져들며 화엄사로 들어가 독신수도생활을 시도하기도 했다. 82년 윤형주와13년만에트윈폴리오를 재결성, 음반을 발표하며 팬들의 향수를 달래주더니 85년에는 세계적인 가수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에 의해 취입이 추진되었던 공전의 히트곡 <우리는>으로 5회 가톨릭가요대상을 재수상하기도 했다.

요즘 송창식은 서양의 달콤한 곡을 흉내내던 데뷔시절의 음악적 미숙함에서 탈피하여 도가사상과 우리가락에 심취해 자신만의 독특한 음악세계를 구축해 가고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