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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기사

[문헌:8군쇼에서 랩까지] 또다른언더그라운드,포크

by 팬더54 2008. 11. 10.

 

또 다른 언더그라운드, 포크

 

주류도 반주류도 아닌 그 자리에 서서

 


1999년은 포크음악이 이 땅에 뿌리를 내린 지 30년이 되는 해이다. 하지만 그 오랜 연륜만큼 튼튼한 뿌리를 뻗어나가지는 못하고 있다. 1990년대가 저물어가는 지금 댄스음악으로 대표되는 주류와 락으로 대표되는 비주류의 사이에서 포크음악은, 그 주된 대상이었던 70년대의 젊음을 트롯트에게 내주고는 그 화려했던 과거를 접고 있다.

 

''""""'' 한국의 포크음악은 1968년 명동의 음악카페 '세시봉'에서 통기타만을 들고 무대에 서서, 경쾌한 비트와 발랄한 음색으로 젊은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듀오 "트윈 폴리오"에 의해 시작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트윈 폴리오"는 지금은 너무나도 유명한 송창식과 윤형주의 듀오로, 그들은 1969년 첫 독집음반을 발표해 '하얀 손수건'이란 곡을 유행시키며 커다란 인기를 얻게 된다. 같은 해 10월 미국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돌아 온 한대수가 남산 드라마 센터에서 <물 좀 주오>, <고무신>등의 강한 자의식과 저항적인 메시지가 담긴 파격적인 노래들을 부르며 본격적인 포크가 열리게 된다. -일부는 1968년에 발매된 한대수의 데뷔앨범을 한국 포크음악의 시초로 보는 이들도 있다. -

 

'''''' 이렇게 대학가와 이른바 '다운타운'에 자신들의 아지트를 건설한 포크음악은 1960년대 중반까지의 지난 70년동안 실질적인 구매력을 지닌 기성세대가 주도권을 쥐고 있던 대중음악계에 누구나 튕길 수 있는 (이는 생산 담당자와 수용자를 분리시켰던 대중음악의 소외를 극복하고 음악의 생산과 소비의 경계를 최대한 좁히는 민주주의를 생성시킨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된다) 통기타 한 대로,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젊은 정신', '젊은 기질'을 발산하며 일대의 혁명을 가져오게 된다.
''"" 한대수의 등장 이후 등장한 서유석은 '한국의 밥 딜런'을 자청하며 "학교 앞에는 대폿집이 둘이요/ 양장점이 열이요"라는 사회상을 풍자한 노래를 즐겨 다루면서 삽시간에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군림한다. 또한 당시 대학생이던 김민기는 레너드 코헨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토속적이고 메시지가 강한 <작은 연못>, <무궁화 꽃>'''등을 발표, 이들은 대학가에서 그 세력을 키워 나갔다. 이들 한대수, 서유석, 김민기는 소위 '포크의 트로이카'를 이루었다. -참고로 '여성 트로이카는 <세노야>의 양희은, <모닥불>의 박인희, <새색시 시집가네>의 이연실이다.-

 

'''''' 1970년대 초반은 포크의 춘추전국시대로 그 주역들 이외에 양병집, 이필원등의 정통포크와 트윈 폴리오, 어니언스, 4월과 5월 등의 모던포크 밴드등이 활동하였는데, 이들은 명동의 '오비스 캐빈'과 '금수강산' 그리고 가장 큰 인기를 누린 '쉘부르'등 연이어 문을 연 통기타 살롱등에서 연주를 하면서 식을 줄 모르는 생맥주의 인기, 그리고 청바지 (여러분 영화에서 보신 그 촌스러운 나팔청바지 기억 나시지요?)와 함께 1970년대의 청년문화의 세가지 상징이 되면서 그 화려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 하지만 이렇듯 맹위를 떨치던 포크음악은 197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갑작스레 퇴?strong style="background:#ffff00;">또構?된다. 그건 당시 '유신체제'하에서는 포크음악의 특징인 메시지 전달이 거의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 1975년 대통령 긴급조치 9호 발표로 소위 유신시대에 희생양이 된 가요들은 <아침이슬> (김민기 작사.작곡), <왜 불러> (송창식 작사. 작곡), <고래사냥> (최인호 작사. 송창식 작곡) 등이 있다.- 이에 한대수는 이땅에서는 더 이상 노래를 쓰고 부를 자유가 없다며 미국으로 건너갔고 김민기는 요주의 인물로 찍혔으며, 서유석은 노래를 그만두게 된다. 다른 여타 가수들도 대마초 스캔들에 휘말려 활동을 중단하는 바람에 포크음악은 깊은 침체기에 빠지게 된다.

 

그 후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조동진이 극적인 재기에 성공, 자신만의 독특한 영역을 구축하면서 언더그라운드라는 독자적인 분야를 구축해 80년대 이후 새로운 집단을 이끈 대부로 군림한다. 동시대에 동물원, 시인과 촌장, 이주호가 주축이 된 해바라기, 신형원, 강은철, 유익종 (이 또한 해바라기의 멤버였습니다.) 등이 포크가수로서 활동을 하기는 했으나, 그들의 음악은 70년대의 포크음악의 본질과는 조금 멀어져 있었다. 더욱이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컬러TV의 등장이후 대두된 댄스음악등의 인기에 밀려 포크음악은 대중의 인기보다는 이 음악을 사랑하는 일단의 팬들에 의해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 1990년대의 포크음악은 김광석이라는 이름으로 대변할 수 있다. '동물원' 출신의 그는 솔로로 전향한 후 그의 독특한 음색에 현대인의 소외 뿐만 아니라 사랑이야기, 평범한 일상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들이 삶에서 느끼는 일상을 가사에 담은 노래를 불러 소수의 포크음악 팬들뿐 아니라 일반 대중들에게까지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가 다시 한 번 일으킨 포크음악의 부흥에 힘입어 안치환 (민중가요를 부르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멤버였음), 권진원, 한동준, 장필순 등이 대중의 사랑을 얻게 된다.

 

하지만 1996년 김광석이 목을 메달아 자살을 하면서 포크음악은 다시 한 번 명맥이 끊기게 된다. 지난 해만 하더라도 엉클, 안치환, 노래마을 등의 음반이 줄줄이 실패했고 포크 가수들의 공연도 큰 성공을 이루지 못했다. 이처럼 90년대에 들어 포크가 급속히 쇠락한 것은 10대의 입맛에만 맞는 댄스음악이 가요계를 지배한다는 외적 요인도 있지만 무엇보다 포크 가수들 자신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는 것도 큰 이유로 지적이 된다.

 

1990년대에 댄스음악이 있었다면 1970년대에는 포크음악이 존재했다. 하지만 댄스음악 외에도 다양한 종류의 음악이 자기만의 세력을 구축해나가며 사랑을 받고 있는 90년대에 비해 70년대의 포크음악은 그 시대 자체를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 90년대의 포크음악은 또 하나의 언더그라운드로서, 나아갈 방향을 잃어버린 70년대의 슬픈 자화상이 되어버렸다.

 


참고문헌 : <8군쇼에서 랩까지> 신성원 저. 아름출판사

 


글: 이소란
출처 : BLUENO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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