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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기사

[기사] 송창식 “서태지 등장 후 팬 취향 변해 앨범 포기”

by 팬더54 2009. 12. 31.
[원문]   http://news.joins.com/article/561/3914561.html?ctg=15

2009.12.09 16:49 입력 / 2009.12.09 18:43 수정


송창식1집['75] - 02 꽃,새,눈물

 

한국 ‘포크음악의 전설’ 송창식(62)을 만났다. 그것도 밤 10시가 넘어서다. 그는 통행금지 시절 가장 조용한 밤 12~4시에 곡 작업을 했다. 수십 년간 그렇게 살다 보니 이제는 올빼미처럼 밤낮이 뒤바뀌어 산다. 1987년 경기도 광주의 퇴촌으로 낙향한 그는 지난 88년 음반을 낸 이후 곡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깜놀(깜짝 놀람)이다. 돌이 지난 손녀까지 둔 그가 애플·IBM 등 데스크톱 3대, 노트북 3대 등 총 6대의 PC를 소유한 컴퓨터 도사란다. 하루도 통기타를 손에서 놓지 않는 그가 컴퓨터 음악을 한국서 최초로 했단다. ‘고래사냥’ ‘푸르른 날’ 등 히트한 자작곡만 200곡이 넘고 자신이 개량한 한복만을 입는 그가 아날로그형 인간일 줄만 알았는데.

“나이 먹는 게 너무 좋아요”

그에게 물었다. 청바지·통기타·생맥주로 상징되는 70년대 유명한 세시봉과 오비스캐빈 등 명동 음악 살롱, 윤형주와 함께한 1년 8개월의 듀엣 트윈폴리오, 이후 솔로 시대의 수많은 히트곡들의 의미는? 삶에 도통한 도사 하나가 답했다. “화려한 전성기가 중요하지 않다. 나는 나이 먹는 것이 좋다”다.

안티에이징이 아니라 웬 나이 예찬론? 그에 따르면 노래는 젊었을 때는 젊게 부르고 나이 먹으면 늙은 사람의 깊이로 불러야 한다. 무협소설을 보면 나이 많을수록 ‘고수’가 많듯이 노인은 노인의 창법으로 노래해야 한다. 노래 솜씨란 전성기나 늙어서나 그게 그거다. 자신은 마흔에는 마흔, 예순에는 예순의 노래를 부른단다.

그는 초등학교 입학 전 악보를 볼 정도로 음악 재능을 타고났다. 그가 되고 싶었던 건 음악가였고, 실제 꿈은 오케스트라 지휘자였다. 클래식을 전공했지만 찢어지게 가난해 포기했다. 그가 가수가 된 건 클래식 창법으로 대중가요를 소화해낸 조영남 때문이다. 세시봉과 오비스캐빈에서 조영남을 비롯, 윤형주·이장희·김세환·김민기·양희은 등 당대 내로라하는 통기타 가수들을 만났다. 그 중 외국 팝송에 대한 지식과 소양이 깊은 윤형주를 따라 트윈폴리오를 결성했다. 데뷔 무대는 당시 중앙일보 건물에 있던 TBC의 ‘한밤의 멜로디’. 들꽃같이 애틋한 송창식과 달콤한 목소리의 윤형주의 하모니를 통해 대중 음악에 대해 더 깊이 발을 들여놓는다.

나이 들수록 깊어지는 내공 ‘고수의 길’

그는 한국의 싱어송라이터 1세대다. 당시 누구나 그의 노래를 한두 곡씩 흥얼이며 다녔다. 그의 책상에는 아직도 메모 형식으로 쌓여있는 곡이 1000곡이 넘는다. ‘음악의 수도승’으로 불리는 그의 창작에 얽힌 일화들도 많다. 이장희가 가사를 쓴 ‘창 밖에는 비오고’는 가사 쓰는 동안 만들어 1분이 채 안 걸렸다. ‘가나다라’는 일본에 갔다가 재일동포들에게 말을 가르쳐주고 싶어 만들었다. 그는 생전에 미당 서정주를 찾아 ‘당신의 시 중 노래 잘 어울릴 것 같다’며 ‘푸르는 날’을 헌곡했다. “외국에 가보니 한국인 체구에 딴 걸 입으면 폼이 안 나더라. 돌아와 혼자 디자인과 재봉질을 해 만든 개량 한복”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그는 요즘 가수들에 대해 “전체적으로 옛날 가수보다 노래를 잘한다. 하지만 열심히 안 한다”고 평했다. “진짜 노래에 대한 가치, 그 이상의 가치를 발견하려면 죽자 살자 열심히 해야 하는데…. 그래도 이승철이 좀 하는데 아직 뭐가 부족한지 모르더라.” 마치 선문답 같다. “서태지 이후 나이 든 팬들은 물러나고, 젊은 팬들이 전면에 나섰다. 둘이 공존했으면 좋았을 걸.” 그는 “92년 서태지 등장 이후 팬의 취향이 바뀌었다. 그래서 88년 이후 판을 내지 않고 있다”고 웃었다. 포크·트로트포크 트로트 국악적인 요소들이 버무려져 그만의 탑을 쌓은 자신의 수많은 히트곡도 “가치 없는 거라면 도태되어도 할 말이 없다. 가치 있다면 갈 만큼 간다”고 믿는다.

“고교 중퇴 큰 아들 게임사 스토리작가”

가수 송창식의 큰 아들은 한국 최대 게임사 엔씨소프트에 스카우트된 유명 스토리작가다. 어려서부터 게임을 좋아했던 그는 일본 게임을 하면서 혼자 일본어와 영어를 마스터했다. 시간이 아깝다며 고교 1년 때 중퇴했다. 막내도 대학교에서 게임공부 중이다. 놀라운 건 게임사 다니는 큰아들이 자신의 PC가 고장 나면 고쳐달라고 한다는 송창식의 컴퓨터 솜씨. 그는 초기 모델인 아미가·매킨토시·유닉스 컴퓨터도 써봤다. MS DOS시절부터 윈도우까지 프로그램도 책을 사서 독학으로 섭렵했다. 그가 보유한 컴퓨터만도 애플·IBM 등 데스크톱 3대, 노트북 3대 등 총 6대다.

그는 “컴퓨터 음악을 맨 처음 쓴 게 나다. 미디 쓰는 법을 후배들에게 가르쳐줬는데 애들이 안 했다. 그래서 한국 컴퓨터 음악은 2세대로 넘어갔다”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누구에게도 공개된 적이 없는 퇴촌 집은 그가 5년 동안 홀로 배워 컴퓨터로 직접 설계했다. 통기타를 맨 음유시인, 아날로그 인간으로 알려진 그가 의외로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결합인 ‘디지로그’를 실천하는 전형이라는 것. 또 하나의 미스터리였다.

▲송창식은 기인? 그 오해와 진실

송창식은 가끔 ‘기인’으로 오해 받는다. 밤낮을 바꿔 살다 보니 좀체 TV 등에서 볼 수 없다. 그의 기상 시간은 오후 2시. 기상해 하루도 빠지지 않고 홀로 2시간씩 운동과 음정 연습을 한다. 누구도 본 적 없는 그의 운동은 잠자리에서 발가벗고 한다. 만나는 사람도 윤형주·김세환 등 몇이 안 된다. 심심하지 않을까. “5시간 혼자 보내는 시간과 수면 8시간을 빼면 13시간밖에 없어요. 심심할 틈이 없어요. 기타 연습 하고, 노래하고, 인터넷 검색 하고.” 그는 특이하게 골프를 치지 않으면서 골프 치는 것을 보는 게 제일 재밌다.

그의 가족 구성도 기인 이미지에 한몫한다. 그의 집에는 아내와 쌍둥이인 처형이 함께 산다. 처형은 유기농동호회 회장으로 몇 백 평의 농사를 짓는다. 그의 슬하는 아들 둘 딸 하나. 장가 간 큰 아들과 디자이너인 딸, 막내는 대학에 다닌다. 통기타와 유기농 그리고 혼자만의 운동, 컴퓨터. 그의 삶은 노래를 빼면 베일을 쉽게 벗길 수 없다.

대중음악평론가 강헌은 언젠가 “가왕 조용필에 겨룰 수 있는 단 한 명의 거장은 단연 송창식”이라고 꼽은 바 있다. 그는 누가 뭐라해도 영원한 가객(歌客)이다. “몇 살까지 노래할지 상상이 안 가지만 계속해서 해야 할 음악적인 일과 노래가 많다”고 했다. 그는 윤형주와 김세환과 오는 22일부터 이틀간 여의도 63빌딩에서 디너쇼를 갖는다.

박명기 기자[mkpark@joongang.co.kr]

▲송창식 프로필

·출생: 1947년 2월 2일
·데뷔: 68년 ‘나는 너’
·히트곡
- 윤형주와 ‘트윈폴리오’ 시절:‘하얀 손수건’ ‘웨딩 케익’ ‘축제의 노래’
- 솔로 활동 70년 이후: ‘고래사냥’, ‘왜불러’ ‘사랑이여’ ‘애인’ ‘담뱃가게 아가씨’ ‘맨처음 고백’ ‘피리 부는 사나이’ ‘가나다라’ ‘푸르른날’ ‘한번쯤’ ‘상아의 노래’ ‘그대 있음에’ ‘꽃보다 귀한 여인’ ‘사랑이야기’ 등 자작곡 200여곡

·수상
75년 영화 '바보들의 행진' OST ‘고래사냥’으로 MBC 가수왕
85년 가톨릭가요대상
2008년 KBS 200회 맞은 7080에서 뽑은 명곡에 ‘고래사냥’ ‘우리는’ ‘하얀 손수건’ 3곡 선정

·경력: 트윈폴리오 결성(68)
솔로가수 전향(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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