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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기사

[기사:딴지일보] 우리에게도 "초!!천재" 뮤지션이 있다는걸 알고 있는가?

by 팬더54 2010. 7. 2.
[문화] 우리에게도 "초!!천재" 뮤지션이 있다는걸 알고 있는가?

2010.02.05.금요일
문화불패 딴지메롱

편집자 주
게시판의 글이 3회 이상 메인 기사로 채택된 '딴지메롱'님께는 가카의 귓구녕을 뚫어 드리기 위한 본지의 소수정예 이비인후과 블로그인 '300'의 개설권한이 생성되었습니다. 조만간 필진 전용 삼겹살 테러식장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공지 늦게 올린 점, 딴지메롱님께 사과드립니다. 꾸바닥~)
 

먼저 누군지 말해주면 재미 없으니까 스무고개 놀이하자.
 
다섯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초등학교 때는 어머니가 가출하시어 친척집을 전적하였던 전설의 레젼드!
 
초등학교 시절 "노래와 악보와의 관계"를 금새 파악해 1년만에 작곡을 할 수 있게 된 전설의 레전드!!
 
중학교 재학 때 ,"남들도 날 모차르트라고 불렀고, 나도 내가 스스로 모자르트 라고 생각했따."는 전설의 레전드!!!
 
중3때 경기음악콩쿠르 성악부분 1위를 차지했떤 전설의 레젼드!!!!
 
공부도 잘하는 엘리트 였지만 음악에 뜻을 둔 후 집안의 반대를 무릎쓰고 서울예고 성악과에 진학했으나 돈이 없어 학업를 포기한 전설의 레젼드ㅜㅜ
 
그와 고등학교 동창인 금난새 씨가 그를 두고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정말 음악에 천재적인 친구가 있었다고...배고파서 날마다 학교 수돗물로 배를 채웠던 기억이 난다고..."
 
수돗물을 많이먹던 천재가 생각나요..
 
아직도 누군지 모르겠는가??
 
그럼 성악 전공의 고등학교 중퇴자인 그의 데뷔무대를 그의 절친의 기억을 통해 보자.
 
 
...***의 출현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누구나 ㅆㅅㅂ으로의 출현은 극적일 수밖에 없었으나 ***의 경우 그 극적 구성이 두드러졌다. 홍익대 출신의 명사회자로부터 오늘의 가수가 소개되었다. '***!'

남루하기 짝이 없는 옷차림에 낡은 밤색 군화를 무겁게 끌면서 한 인간이 간이무대를 향해 층계를 올라서고 있었다. 기타를 둘러맨 사나이가 허수아비 모양의 팔과 의족처럼 따로 노는 다리를 이끌며 무대에 올라왔다. 흙 퍼 올리는 기중기의 몸짓으로 기타를 가슴에 끌어안았다. 까닭을 알 수 없는 엷은 미소가 큰 입에 번져 있었다. 그 미소는 영화의 흉악범들이 범죄 직전에 짓는 야릇한 형상의 미소였다. 누가 저 자의 심중을 가히 헤아릴 수 있으랴.
 

기타는 시골 약장수의 것보다 더 낡아 보였다. 긴 손가락으로 마이너 조의 아르페지오를 읊어 나갔다. 한음 한음 신중한 연주였다. 그러다가 청아한 그의 음성이 기타의 선율에 섞여 나왔다. "우나후루 티바 라그리마아---" 참으로 뜻밖의 곡조였다. 오페라 <사랑의 묘약> 중 그 유명한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었다. 오페라 아리아를 오페라 가수답지 않은 평범한 목소리로 그러나 조금치의 품위도 떨어뜨리지 않은 채 끝까지 불러 나갔다. 대한민국 음악사상 오페라 아리아를 자신의 기타 반주에 맞추어 정식으로 관객 앞에 열창해내기는 ***이 처음이었으리라. 최고의 찬사는 눈물이었다...
 
***은 그렇게 시작부터 신비의 사나이였다. 피리를 부는 느낌의 사람이었다. 스스로 기피하는 성격의 소유자는 아니었으나 우리는 어느 누구도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우리가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인천쪽에서 왔을 것이라는 추측뿐이었다. (ㅈㅇㄴ)
 
 
 
아무튼 그는 그곳에서 명문대생 ㅇㅎㅈ를 만나 듀오를 결성하고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었다. 지금도 그 듀오는 전설의 레젼드 듀오나 얼마 안 가 해체한 그 듀오는 다시 듀오를 이루지는 않았다는 슬픈 전설이 전해진다.
 
 
레전드가 된 듀오
 
지금쯤이면 눈치 챈 딴지스들이 많을 거 같으니 이쯤해서 그 전설의 레젼드를 밝혀야 할 거 같다. 아무튼 그 전설의 레젼드는 화려한 인기를 뒤로 하고 군에 입대 한 후 자신의 음악에 대한 반성의 시간을 가진다.
 
 “제가 73년 병무청에서 군 생활을 하면서 제 음악을 찬찬히 되돌아볼 시간을 갖게 됐습니다. 비교적 객관적 입장에서 나를 보게된 거죠. 그랬더니 내가 만든 음악이 너무나도 형편이 없게 느껴졌습니다. 노래만 따지더라도 '아마추어 국악 경연대회에서 우승한 여학생보다 내 노래가 못하더라'는 생각에 모골이 송연해졌습니다. 정말로 창피했고 그 동안 허송세월을 보냈다는 것에 분하기까지 했습니다. 자괴감에 군 복무 3개월 내내 눈물로 지샜어요. 
제대한 후 작심하고 내 음악 체계 모든 것을 바로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음계, 소리, 화성학 체계를 위시해 음악 전반을 다시 연구했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음악', '한국인 송창식, 내 속의 것'을 해야 한다는 자각에 이르렀지요. 그러고 난 뒤 발표한 곡이 바로 '피리 부는 사나이'였습니다. 이 노래의 가사에서 '언제나 웃는 멋쟁이'의 '어∼언제나' 부분은 특이한 음정이 구사됐는데 나의 그런 연구를 실제로 적용한 겁니다. 이후 실험적인 소절을 대중반응의 추이를 보고 점차 늘려나갔어요.” 
 
 
그 전설의 레젼드는 다름 아닌 송창식이다.
 

 

 
어떤 사람들은 가왕이라는 용필이 형님보다 창식이 형님을 더 윗길에 놓기도 한다.
 
처음에 나같은 경우에는 창식이 형의 가창력에 뻑! 갔었다. 가히 한국 최고라고 할만한 가창력이라고 우기는 중이다. 가끔은 애절하고, 가끔은 한을 뱉어내는 듯 하고, 어쩔때는 락킹하기도 하고, 뮤지컬을 보는 듯한 목소리의 전달력 등등 가히 한국 최고의 가창력이라고 할 수 있다.
 
잘 모르겠다는 사람은 "왜 불러" 한곡만 들어보시라.  '왜불러, 안들려' 할 때의 한을 삭이고, 뱉어내고 하는 락킹 한 목소리와 '아니 안되지~' 할 때의 애절한 목소리 ...ㅡㅡb  이런건 내가 국민학교 6학년 때부터 광팬이었던 프레디 머큐리 형도 못 따라 부르는 노래라고 생각한다. 한 곡만 더 추천하자면 "나의 기타 이야기" 도 한 번 들어보시라. 뻑간다.
 
그러한 가창력 외에도 "가나다라" "가위바위보" 와 같은 작사능력, 또 앞서 말한 곡들 및 "밀양머슴아리랑" 같은 한국적 정취의 음악을 만들어 내는 작곡능력 ㅡㅡb 
 
이러한 창식이 형의 천재적인 재능은 다음의 인터뷰기사를 보면 확인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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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회심작 '토함산'을 내놓는다. 이전의 작품과는 사뭇 기조가 다른 이 앨범을 계기로 그는 음악생애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국악과의 접목'으로 숨가쁘게 내달리게 된다. 그리하여 1980년 '가나다라' '에이야홍 술래잡이', 1982년 '마의태자'와 같은 현대 가요사의 유산이라 이름할 값진 성과를 거두게 된다. 그 자신 음악적 진화의 절정을 굴삭해낸 것이다. 그 무렵 그는 가사를 쓸 때도 말로 쓰지 않고 '웅얼거리는 소리'로 쓴 뒤 그 의성어들과 비슷한 언어를 찾아 노랫말을 짰다고 한다. 그가 국악에 심취했을 때의 음악적 관점은 지금의 신세대들에게도 귀감이 될 만한 내용이다. 
“우리 음악은 서양음악과는 모든 게 달라요. 그들 음악은 수학자 피타고라스에 의해 음이 분류되어 7음계 형식으로 정착되었어요. 상당히 철학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우리의 음은 수학이나 철학이 아닌 우리 몸에 내재된 힘이나 영혼의 개념으로 나뉩니다. 따라서 우리의 몸에 서양음악의 방법을 덧씌우면 제대로 될 리 만무하지요. 
일례로 외국의 유명 지휘자가 한국 연주자나 성악가가 노래하는 것을 보고 '다 훌륭한데 기본이라 할 음정과 박자가 안 맞는다'고 토를 답니다. 당연하죠. 생래적 음의 표현방식이 다른데 어찌 그들과 같겠어요? 우리가 틀린 게 아니라 단지 다른 것뿐인 겁니다. 이것은 애초 우리가 서양으로부터 음악을 잘못 받아들여 잘못 알고있다는 말이 됩니다. 한국인으로서 우리가 한국 고유의, 전통의 음을 찾는 것은 의당 제가 가야할 길이었습니다.”
그의 음악을 놓고 의도했던 하지 않았던 1970년대의 암울했던 시대에 맞서거나 개입한 흔적, 말하자면 시대성과 사회적 맥락을 결부시킬 수 있을지는 몰라도 실제의 그는 언제나 음악의 근원을 면밀히 탐구해나간 '순수음악가'라는 표현이 정확할 듯했다. 소리와 음악에 대해 장광설을 피울 때의 모습에선 마치 도인의 경지를 느끼게 했고, 또 그만큼 어렵게 들렸다. 의미를 따라잡는데도 진땀이 났다.
-송창식씨의 음악은 듣기는 괜찮은데 막상 부르려고 하면 어렵습니다. 후배들이 리메이크를 많이 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봅니다. 독특함의 결정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한데, 왜 그렇다고 보십니까?
“내 음악을 독특하다고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비애입니다. 우리 소리를 살펴 풀어놓은 것일 따름인데. 우리가 우리를 외면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제 음악이 그때 사람들에게 새로웠겠죠. 전에는 그런 노력이 없었으니까요. 
돌이켜보면 그렇게 대중들이 좋아하게끔 음악을 만들어낸 것은 '운'이었을 겁니다. 시대적으로 맞았던 것도 운이고. 하기야 '우리나라 사람들'을 염두에 두지 않고 쓴 곡은 없었어요. 내 음악에 대해 만족할 수 없지만 그래서 대중적으로는 괜찮았을 거예요.”
그는 후대에의 음악적 영향에 대해서 “어떤 후배들에게도 음악적으로 영향을 못 미쳤다”고 잘라 말했다. “음악이 아닌 오로지 자신이 성공한 것만 그들이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1978년 데뷔한 정태춘, 비슷한 길을 밟아간 김수철, 그리고 지금도 음악적 도약을 위해 국악을 기웃거리는 신세대 뮤지션 등 그의 사정권에 들만한 이름이 나오기를 기다렸지만 그는 아무도 거명하지 않았다. 


음악의 본질 향한 구도(求道)
 

 
송창식에게 있어서 음악적 완성이나 포만감이란 있을 수 없는 듯 했다. 앨범을 내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설령 목표에 근접한 음악을 구상했어도 혼연일체로 소리를 내줄 연주자가 없어서 앨범의 실현가능성은 없다”고 부연 설명했다. 그는 언제나 그래왔듯 여전히 음악의 심연을 향해 파고 들어가는 과정에 있었다. 어쩌면 음악을 통해 구도(求道)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에게 부, 명예, 유행 그리고 시대의 요청 등 모든 음악 외적인 것들은 창공에 흩어지는 담배연기처럼 하잘 데 없는 것들이었다. 
어느새 시간은 자정으로 향하고있었다. 하지만 밤이 깊어가자 그는 피곤함은커녕 도리어 처음보다 생기가 넘쳐흘렀다. '록시' 라이브카페로 내려오자 그를 알아본 손님들의 사인공세가 쇄도했다. “음악이 너무 좋아요!” “요즘에 들으니까 더 후련해요!” 비틀즈의 고(故) 존 레논이 노래 속에서 그랬던가. '당신은 나를 몽상가라고 할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우리와 같이 가게 되리라'라고. 당장은 아니겠지만 언젠가 한국에도 이 정도 크기의 음악세계를 가진 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많은 이들이 기억하게 되리라는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신동아, 임진모 인터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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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초천재 뮤지션이 왜 새 음반을 안 내고 있을까? 1987년 참새의 하루 이후 신보가 안 나왔으니 23년이나 되었다. 이건 한국가요계의 큰 손실인데 왜 이러한 안타까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다음의 인터뷰 내용을 보시면 된다.
 
-이런저런 작품에 참여하긴 했지만 독집 음반으로만 따지면 무려 15년간 공백을 갖고있는 셈입니다. 음반이 음악가의 중요한 호흡무대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아직도 송창식의 앨범을 찾는 사람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점에서 선뜻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게다가 많은 곡을 써놓았다는 말도 들은 바 있습니다. 일각의 얘기처럼 음반회사에서 앨범 출반을 주저하는 건가요?
“누가 그러던 가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음반을 내겠다고 결심하면 음반을 내겠다는 레코드사는 얼마든지 있어요. 지금까지 써놓은 곡도 1000곡쯤 될 거고. 문제는 내게 있습니다. 한창 때 무려 20장이나 되는 음반을 내놓았지만 솔직히 그 때마다 단 한번도 앨범이 '괜찮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항상 부족하고 불만스러웠지요. 하지만 대중의 요구나 음반사의 행정을 고려해서 그냥 내곤 했던 겁니다.
지금도 내 곡에 만족스럽지 않은 건 마찬가지죠. 음반 발매를 위해 곡을 쓰려고 책상머리에 자리하면 아득하고 혼미스럽기만 해요. 인기나 판매량과 같은 이윤동기는 이제 내게 의미가 없어요. 만약 내 작품에 만족한다면 당장 앨범은 가능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써놓았던 곡들은 하나도 수록하지 않을 거예요. 모두 새로 쓸 겁니다.”
 
그렇다. 초천재뮤지션의 자존심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올해도 전설의 레젼드 송창식의 신보를 목이 빠져라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작은 바람이 있다면 그건 쌈싸페 같은 락페에서 창식이 형의 공연을 보는 것이다.
 
2008년 쌈싸페에서 나를 미친듯이 뛰게 만들었던건 노브레인이 아니라 창완이 형의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 였고, 황신헤밴드의 "킬로만자로의 표범" 이었다. 그 두 무대가 내가 기억하는 2008 쌈싸페 최고의 무대였다. 창식이 형 노래 중에도 락킹한 노래가 많은데 "고래사냥" "가나다라" "밀양머슴아리랑" 같은 노래를 락페스티벌에서 꼭 한번 봤으면 좋겟다. 그 공연은 정말이지 전설의 레전드급의 공연이 될 것을 알고 있기에!
 
 
 

 
                     창식이 형 더 늙기 전에 젭알 ㅜ _ㅜ
 
 

                                 -왜 불러-

 

 

-가나다라-

 

 


 
 

가나다라마바사 아자차카타파하 헤이헤이
하고싶은 말들은 너무너무 많은데 이내
노래는 너무너무 짧고 일이삼사오륙칠팔구하고
십이요 헤이헤이 하고싶은 일들은 너무너무
많은데 이내 두팔이 너무 모자라고

일엽편주에 이마음 띄우고 허 웃음한번 웃자
어기여 어기여 노를 저어 나아가라 가자 가자 가자
가슴한번 다시 펴고 하늘천따지 검을현 누루황
헤이헤이 알고싶은 진리는 너무너무 많은데 이내
머리가 너무너무 작고 일엽편주에 이마음 띄우고
허 웃음한번 웃자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헤이헤이
쫓고싶은 인물은 너무너무 많은데 이내
다리가 너무너무 짧고 갑자을축 병인정묘
무진기사 경오신미 헤이헤이 잡고싶은 순간은
너무너무 많은데 가는 세월은 너무너무 빠르고
일엽편주에 이마음 띄우고 허 웃음한번 웃자
어기여 어기여 이리뛰고 저리뛰고 뱅글 뱅글
뱅글 다시보면 다시 그자리 중건천 중곤지

수뢰둔 산수몽 헤이 헤이 하늘보고 땅보고
여기저기 보아도 세상만사는 너무너무 깊고
일엽편주에 이마음 띄우고 허 웃음한번 웃자
일엽편주에 이마음 띄우고 허 웃음한번 크게 웃자고
(출처 : 가사집)
 
 
그리고 너님들 그거 아냐? 천재도 유전된다는거 >_<
창식이 형 아들 검색해보면 그 증거를 알 수 있다 ㅡㅡ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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