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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기사

[평론:최규성] 추억의 LP여행-송창식(上)기타 선율에 실어보낸 고단한 삶

by 팬더54 2008. 11. 8.

 

                       [평론:최규성] 추억의 LP여행-송창식(上)기타 선율에 실어보낸 고단한



[75 송창식2집] B-3 사랑(Over and over)



가수들 조차도 노래잘하는 가수로 찬사를 보냈던 송창식. 그가 들려준 서정적이고도 신명나는 노래가락들에 자유로왔던 70년대 젊은이들은 없었다.


포크의 태동기부터 현재까지 30여년동안 걸어온 음악세계는 성악, 팝송, 포크, 트로트에서 국악적 요소가 녹아든 대중가요에 이르기까지 실로 형형색색이었다. 명 짧기로 유명한 대중가요계에서 그의 질긴 음악생명력은 무엇보다 더 모든 계층을 포용한 편안한 노래가락에서 얻어졌다.


또한 바보스럽게 히죽 웃는 모습은 그에게 쉽게 다가설 수 있을 것 같은 친숙함을 주었다.


송창식은 동시대 모든 젊은이들이 노래 한곡쯤은 외우고 다녔을 만큼 사랑받았던 국가대표급 통기타 가수였다.


1947년 경찰관이었던 부친 송영숙의 1남1녀중 장남으로 인천 신흥동에서 태어난 송창식. 모친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만큼 복잡했던 가정사는 고단했던 유년시절을 짐작케한다.


5살의 어린 나이에 백령도로 참전하러 떠났던 아버지의 전사 소식을 들었고, 9살때는 남매손을 잡고 이골목 저골목 행상을 다녔던 어머니의 가출로 시퍼런 세상에 고아처럼 내던져졌다.


데뷔초기 고아가수로 주위의 수근거림이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부모 없이 할아버지 슬하에서 성장하면서 가난으로 인해 감수해야했던 견디기 힘든 세상사람들의 구박은 남을 믿지 못하는 불신감을 어린 가슴속에 키우게 했다.


또래들과 어울리지도 못해 동네북처럼 얻어맞는 신세여서 북받히는 설움으로 온동네를 울면서 홀로 돌아다녔던 초등학교 입학전의 송창식은 울보대장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날 낯선 어른이 하모니카로 아리랑을 부르는 모습에 마음을 빼앗겼다. 늘 따뜻하게 대해 주던 막내삼촌을 졸라 마련한 하모니카는 그의 유일한 친구가 됐다.


가사나 멜로디의 암기력이 뛰어났던 송창식은 하모니카로 못부르는 곡이 없을 정도로 동네에 소문이 났다. 하모니카 덕에 외톨이이던 그의 주변에 또래들이 모이면서 항상 기죽어 지내 축처진 어깨도 으쓱해졌다.


2살이나 늦게 인천 신흥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이미 한자와 국어, 산수를 배워온지라 칠판에 한자로 자신의 이름을 적어 모두를 놀라게 했다.


공부에 재미를 붙이고 친구들도 사귀면서 성격 또한 밝게 변했다. 2학년때 임택모 문예담당 선생이칠판에 쓴 <금붕어>란 동시는 슬픈여운을 몇 년간 가슴속에 남겨놓아 5학년때 처음으로 그 느낌을 작곡하기도 했다.


오락시간에는 하모니카와 오르간을 더듬더듬 치며 온갖 노래를 불러 친구들의 인기가 높았다. 반대표로 교내합창대회 지휘를 맡고 학교연극공연에서 주인공역을 맡으며 적극적으로 학교생활에 임했다.


인천중학 2학년때 영화 <토스카>를 단체관람 클래식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으며 성악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성악을 전공했던 양윤식 음악선생님은 정식으로 음악공부를 시켜주었다. 1년후 중3때는 경기음악콩쿠르 성악부문1등을 차지할 만큼 재능을 보였다.


음악으로 인생의 목표를 찾긴 했지만 늘 그리운 어머니의 사랑은 첫 가출을 하게 했다. 책과 할아버지의 라디오를 팔아 여비를 마련 영등포, 정릉 등 어머니가 있다는 곳을 막연히 찾아나섰지만 허사였다. 노숙자처럼 역대합실을 전전하다 학교로 돌아갔지만 허탈하기 그지 없었다.


제물포고를 지원하라는 집안 어른말을 거역하고 서울예고 성악과에 진학했다. 당시 교감으로 재직하던 한양대 음대학장을 지낸 오현명 선생은 반주자도 없이 입학시험을 치르러 온 송창식의 <오 솔레미오> 반주를 해주었다.


결과는 수석입학. 군경 유자녀 장학금과 심부름 아르바이트로 근근히 학교를 다녔지만 개인 레슨비를 낼 수가 없어 성악을 포기했다.


작곡을 해보려 화성학공부를 해보았지만 가난은 모든 것을 좌절하게 만들었다. 실기시험을 치르지 못해 2학년을 마치자 날아온 유급통지서. 늘 우수한 학업성적을 내던 송창식은 또다시 가출을 했다. 만화가게 점원, 국화빵집 심부름꾼 등을 닥치는 대로했다. 끼니를 걱정하는 밑바닥 삶이었다.


고3이된 친구들이 공부하던 화실에서 잡일을 하며 기거하던 송창식은 친구들의 여름방학때 따라나선 무위도 여행길에서 또한번 반전의 기회를 맞았다.


서울에서 온 몇팀의 학생클럽중 60년대 당시로서는 보기드물게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대학생이 있었다. 성균관대생 서유석이었다. 달콤한 통기타울림으로 학생들을 사로잡는 포크가락에 송창식은 정신이 몽롱했다.


화실근처 목공소로 달려가 엉성한 소리를 내는 기타를 직접 만들어 밤낮을 씨름하며 도중하차했던 성악에 대한 갈증을 달랬다.


홍대 미대로 진학한 친구 염동진을 따라 수업은 물론 교정잔디밭에서 기타를 퉁기며 소일했다. 자신조차 홍대생으로 착각했을 정도이니 당시 언론에 가끔 학력이 홍대졸업으로 나왔던 것은 이 때문. 제법 수준급의 기타 연주실력을 뽐내며 노래하는 송창식은 홍대의 명물이 됐다.


눈여겨보고 있던 무교동의 유명음악감상실 세시봉에서 MC를 맡았던 공예과 2학년 이상벽은 출연을 교섭해주며 인생의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수많은 학생가수들과 교분이 생긴 송창식은 학생가에 제법 인기가 있던 연세대생 윤형주, 이익근을 졸라 세시봉트리오를 결성했다.


활동시작 몇 달만에 이익근이 군입대를 하자 68년 윤형주와 남성듀오 트윈폴리오를 결성, 지금껏 애창되는 <하얀손수건>등 주옥같은 번안곡들을 발표하며 대중들속으로 힘찬 첫발을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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