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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기사

[평론] 한국팝의사건·사고60년(52) 송창식과석기시대

by 팬더54 2008. 11. 10.


당대 최고 연주인들 이끌고 록아티스트로
한국팝의사건·사고60년 (52) 송창식과 석기시대


1978년부터 1987년까지 최고의 연주인들을 기용해 송창식이 제작, 발표한 음반 중 하나인 〈’87 송창식 참새의 하루〉(한국음반) 


 



86 송창식 참새의 하루 1986년 11월


기획연재 : 한국 팝의 사건·사고 60년


포크송과 그룹 사운드, 요즘 말로 포크와 록은 다르긴 다르다. 1970년대까지 전자의 주요 무대는 생음악 살롱과 방송이었고, 후자의 주요 무대는 미8군 무대와 나이트클럽이었다. 그렇지만 포크송 가수가 작사가 및 작곡가로서, 그룹 사운드는 연주자(및 편곡자)로서 양쪽이 제대로 만난 모범적 경우가 있는데, 1970년대 말 송창식과 ‘석기시대’, 이장희와 ‘사랑과 평화’가 좋은 예다. 오늘은 전자에 초점을 맞추자.
1970년대 초중반 이미 젊은이의 우상이었던 송창식은 이 무렵부터는 제작자의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백 밴드를 거느린 아티스트로 거듭났다. 1978년에 발표된 음반에는 유장한 멜로디의 ‘사랑이야’, 유려한 서사를 가진 ‘나의 키타 이야기’, 뽕짝을 멋스럽게 차용한 ‘토함산’ 등의 히트곡을 포함하여, ‘20년 전쯤에’, ‘돌돌이와 석순이’, ‘잊읍시다’처럼 1980년대 대학생들 일부가 애창한 숨겨진 명곡들이 망라되어 있다. 즉, 이 음반은 작곡은 물론 편곡과 연주까지 가수가 미학적으로 통제한 최초의 앨범이었다. ‘아티스트’라는 호칭은 아무 때나 쓰는 말이 아니라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일 것이다.

이 음반에는 이호준, 조원익, 배수연 등 오리엔트 프로덕션의 ‘동방의 빛’의 멤버들뿐만 아니라, 전설적 그룹인 ‘라스트 찬스’ 출신으로, 기타 신동으로 이름을 날린 김석규가 가담하고 있다. 이들은 송창식의 음반과 공연에서 백 밴드로 연주를 해 주는 한편, ‘석기시대’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음악적 조류를 수용하고 실험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아마도 1970년대 후반에 명동 마이하우스를 들락거린 사람이라면 이들의 존재감이 강하게 다가올 것이다. 당시 이들은 ‘한정된 시간 동안 연주하고 돌아가는 세션맨’ 이상이었는데,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송창식이 작업실과 연습실을 겸해서 스튜디오를 차렸기 때문이다. ‘원효로 스튜디오’라고 불렸던 곳인데, 이곳은 ‘김민기가 〈공장의 불빛〉을 비밀리에 녹음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 비밀스러운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상세히 다루어야겠지만, 송창식이 운영한 스튜디오가 이른바 민중가요의 ‘비합법 테이프’ 탄생의 요람이 되었다는 사실은 흥미롭기만 하다. 불행히도 최고의 밴드를 만들고, 자율적 스튜디오를 운영하려고 했던 송창식의 야심은 현실의 벽에 부닥쳐 오래가지 못했다. 원효로 스튜디오는 이런저런 이유로 문을 닫게 되었고, 석기시대는 송창식으로부터 독립한 뒤 배수연을 중심으로 나이트클럽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그룹 사운드가 되었고, 디스코를 연주한 음반 한 종을 남겼다. 나이트클럽에서 활동하는 그룹 사운드가 일반적으로 그랬듯 석기시대에는 많은 멤버가 들락날락했는데, 그 가운데는 1980~90년대 음악 산업계에서 연주자와 편곡자로 맹활약한 송홍섭과 한상원도 포함되었다.

백 밴드를 운영하는 야심은 중단되었지만, 최고의 연주인을 세션맨으로 기용하여 수준 있는 음반을 제작한 송창식의 저력은 1980년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특히 송창식은 최고의 기타리스트를 찾는 데 욕심이 많았던 것 같다. ‘가나다라’가 수록된 〈’80 가나다라 송창식〉에 또 한명의 기타 신동 김양일이 참여한 것이나, 〈’87 송창식 참새의 하루〉에는 ‘사랑과 평화’의 최이철이 참여한 것이 좋은 예이다. ‘가나다라’에서 ‘담배가게 아가씨’에서의 능숙하면서도 맛깔스러운 기타 연주가 이들의 솜씨다. 송창식은 1987년 이후 더 이상 새로운 앨범을 만들어내지 않았지만, 1978년부터 1987년에 이르는 그의 궤적은 포크송 가수가 록 아티스트로 전화하는 과정이라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비록 송창식은 아직도 ‘포크’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지만, 이 과정은 단지 송창식 개인의 궤적이 아니라 한국 대중음악, 특히 언더그라운드 음악이 밟은 궤적이었다. 즉, 포크송 싱어송라이터들은 자신들의 음반에 록 사운드를 담고 싶어 했고, 그에 따라 그룹 사운드 연주인들은 나이트클럽 무대에서 ‘팝송’을 연주하는 것 외에 스튜디오에서 가수들의 음반에서 연주하는 일이 많아진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음반시장이 성장함에 따라 세션맨의 중요성이 커진 것이다.

신현준/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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