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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기사

[평론:최규성] 송창식-그의 노래, 그의 인생

by 팬더54 2008. 11. 7.

    

 

송창식 (71애창곡모음1집) A01.창밖에는비오고요


[평론:최규성] 송창식-그의 노래, 그의 인생

기타 선율에 실어보낸 고단한 삶
<우리는> 그를 국민가수라 불렀다

 

가수들 조차도 노래잘하는 가수로 찬사를 보냈던 송창식. 그가 들려준 서정적이고도 신명나는 노래가락들에 자유로왔던 70년대 젊은이들은 없었다.

포크의 태동기부터 현재까지 30여년동안 걸어온 음악세계는 성악, 팝송, 포크, 트로트에서 국악적 요소 가 녹아든 대중가요에 이르기까지 실로 형형색색이었다. 명 짧기로 유명한 대중가요계에서 그의 질긴 음악생명력은 무엇보다 더 모든 계층을 포용한 편안한 노래가락에서 얻어졌다.

또한 바보스럽게 히죽 웃는 모습은 그에게 쉽게 다가설 수 있을 것 같은 친숙함을 주었다.

송창식은 동시대 모든 젊은이들이 노래 한곡쯤은 외우고 다녔을 만큼 사랑받았던 국가대표급 통기타 가수였다.

1947년 경찰관이었던 부친 송영숙의 1남1녀중 장남으로 인천 신흥동에서 태어난 송창식. 모친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만큼 복잡했던 가정사는 고단했던 유년시절을 짐작케한다.

5살의 어린 나이에 백령도로 참전하러 떠났던 아버지의 전사 소식을 들었고, 9살때는 남매손을 잡고 이골목 저골목 행상을 다녔던 어머니의 가출로 시퍼런 세상에 고아처럼 내던져졌다.

데뷔초기 고아가수로 주위의 수근거림이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부모 없이 할아버지 슬하에서 성장하면서 가난으로 인해 감수해야했던 견디기 힘든 세상사람들의 구박은 남을 믿지 못하는 불신감을 어린 가슴속에 키우게 했다.

또래들과 어울리지도 못해 동네북처럼 얻어맞는 신세여서 북받히는 설움으로 온동네를 울면서 홀로 돌아다녔던 초등학교 입학전의 송창식은 울보대장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날 낯선 어른이 하모니카로 아리랑을 부르는 모습에 마음을 빼앗겼다. 늘 따뜻하게 대해 주던 막내삼촌을 졸라 마련한 하모니카는 그의 유일한 친구가 됐다.

가사나 멜로디의 암기력이 뛰어났던 송창식은 하모니카로 못부르는 곡이 없을 정도로 동네에 소문이 났다. 하모니카 덕에 외톨이이던 그의 주변에 또래들이 모이면서 항상 기죽어 지내 축처진 어깨도 으쓱해졌다.

2살이나 늦게 인천 신흥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이미 한자와 국어, 산수를 배워온지라 칠판에 한자로 자신의 이름을 적어 모두를 놀라게 했다.

공부에 재미를 붙이고 친구들도 사귀면서 성격 또한 밝게 변했다. 2학년때 임택모 문예담당 선생이칠판에 쓴 <금붕어>란 동시는 슬픈여운을 몇 년간 가슴속에 남겨놓아 5학년때 처음으로 그 느낌을 작곡하기도 했다.

오락시간에는 하모니카와 오르간을 더듬더듬 치며 온갖 노래를 불러 친구들의 인기가 높았다. 반대표로 교내합창대회 지휘를 맡고 학교연극공연에서 주인공역을 맡으며 적극적으로 학교생활에 임했다.

인천중학 2학년때 영화 <토스카>를 단체관람 클래식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으며 성악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성악을 전공했던 양윤식 음악선생님은 정식으로 음악공부를 시켜주었다. 1년후 중3때는 경기음악콩쿠르 성악부문1등을 차지할 만큼 재능을 보였다.

 

음악으로 인생의 목표를 찾긴 했지만 늘 그리운 어머니의 사랑은 첫 가출을 하게 했다. 책과 할아버지의 라디오를 팔아 여비를 마련 영등포, 정릉 등 어머니가 있다는 곳을 막연히 찾아나섰지만 허사였다. 노숙자처럼 역대합실을 전전하다 학교로 돌아갔지만 허탈하기 그지 없었다.

제물포고를 지원하라는 집안 어른말을 거역하고 서울예고 성악과에 진학했다. 당시 교감으로 재직하던 한양대 음대학장을 지낸 오현명 선생은 반주자도 없이 입학시험을 치르러 온 송창식의 <오 솔레미오> 반주를 해주었다.

결과는 수석입학. 군경 유자녀 장학금과 심부름 아르바이트로 근근히 학교를 다녔지만 개인 레슨비를 낼 수가 없어 성악을 포기했다.

작곡을 해보려 화성학공부를 해보았지만 가난은 모든 것을 좌절하게 만들었다. 실기시험을 치르지 못해 2학년을 마치자 날아온 유급통지서. 늘 우수한 학업성적을 내던 송창식은 또다시 가출을 했다. 만화가게 점원, 국화빵집 심부름꾼 등을 닥치는 대로했다. 끼니를 걱정하는 밑바닥 삶이었다.

고3이된 친구들이 공부하던 화실에서 잡일을 하며 기거하던 송창식은 친구들의 여름방학때 따라나선 무위도 여행길에서 또한번 반전의 기회를 맞았다.

서울에서 온 몇팀의 학생클럽중 60년대 당시로서는 보기드물게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대학생이 있었다. 성균관대생 서유석이었다. 달콤한 통기타울림으로 학생들을 사로잡는 포크가락에 송창식은 정신이 몽롱했다.

화실근처 목공소로 달려가 엉성한 소리를 내는 기타를 직접 만들어 밤낮을 씨름하며 도중하차했던 성악에 대한 갈증을 달랬다.

홍대 미대로 진학한 친구 염동진을 따라 수업은 물론 교정잔디밭에서 기타를 퉁기며 소일했다. 자신조차 홍대생으로 착각했을 정도이니 당시 언론에 가끔 학력이 홍대졸업으로 나왔던 것은 이 때문. 제법 수준급의 기타 연주실력을 뽐내며 노래하는 송창식은 홍대의 명물이 됐다.

눈여겨보고 있던 무교동의 유명음악감상실 세시봉에서 MC를 맡았던 공예과 2학년 이상벽은 출연을 교섭해주며 인생의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수많은 학생가수들과 교분이 생긴 송창식은 학생가에 제법 인기가 있던 연세대생 윤형주, 이익근을 졸라 세시봉트리오를 결성했다.

활동시작 몇 달만에 이익근이 군입대를 하자 68년 윤형주와 남성듀오 트윈폴리오를 결성, 지금껏 애창되는 <하얀손수건>등 주옥같은 번안곡들을 발표하며 대중들속으로 힘찬 첫발을 내딛었다.

2년남짓 활동한 트윈폴리오는 윤형주의 학업문제로 팬들의 아쉬움속에 1969년 12월 종지부를 찍었다. 송창식은 70년 3월 MBC <목요살롱>에 '비야 내려라'를 부르며 솔로가수로 새출발했다. 이때 불렀던 노래들은 비틀즈의 LET IT BE를 번안한 '내버려두오'와 YESTERDAY 등 주로 팝송들이었다.

짧은 기간에도 불구, 폭넓은 대중적 사랑을 얻은 것은 타고난 노래실력외에도 여성취향의 달콤한 멜로디가 한몫 거들었다. 송창식은 한대수, 김의철, 김민기, 양병집 같은 우직하고 사회참여적인 정통포크가수는 아니었다. 누구나 쉽게 빠져들 수 있는 달콤한 사랑노래를 부르는 상업포크가수였다.

은유적인 저항적 노래가락에 공감하는 많은 정통포크팬들에 의해 그의 노래는 '인기에만 영합하는 측면이 있다'는 일부 비판도 받았다.

MBC라디오 <별밤>의 진행자 DJ 이종환은 자신이 제작기획을한 <별밤에 부치는 노래씨리즈>의 첫 주인공으로 주요게스트였던 송창식을 선택했다.

솔로데뷔음반 <송창식 애창곡모음-유니버샬,K-APPLE36,71년3월>은 1년여동안 불렀던 애창곡 모음집. 자작곡인 '창밖에는 비오고요'등 수록된12곡들은 대부분 애절하고 감상적 분위기의 노래들이었다.

최초의 여성트리오 김씨스터즈가 70년도에 이미 불렀던 <공화국의 전송가(Battlehymn of the republic)>를 <조국찬가>라는 제목의 애국가요로 다시불러 빅히트를 기록한 것은 의외였다.

이곡은 애국가요도 히트할 수 있다는 전례를 남기며 유행처럼 번졌다. 언론의 인터뷰요청과 TV와 라디오 방송출연 요청이 밀려들며 명동, 충무로의 살롱가에선 ‘여학생들에 생명적인 존재 송창식’이란 현수막까지 나붙는 등 요란했다.

그러나 송창식은 TV보다는 얼굴을 나타내지않는 심야라디오프로만을 고집해 <별창식> <밤창식>으로불렸다.

김희갑 작ㆍ편곡집으로 발표된 <송창식애창곡모음2집-유니버샬,K-APPLE56>엔 <비와 나> <내나라 내겨레> <송창식 자장가>등 창작곡이 3곡이나 수록되어 있다.

윤형주에게 먼저 선사했던 <비와 나> 그리고 김민기가 작사한 애국가요 2탄 <내나라 내겨레>는 지금껏 불리어지는 국민가요급노래. 애틋한 옛추억에 잠기게 하는 마력을 지닌 <상아의 노래>는 대학가는 물론 중고등학생들에까지 널리 불리어졌다.

2집발표와 더불어 봇물 터지듯 쏟아져나온 <비의 나그네> <딩동댕 지난여름> <애인>등 주옥같은 노래들은 가히 송창식 돌풍을 일으켰다.

72년 6월 미국작곡가 벤 오클랜드는 내한중 우연히 파티석상에서 <세노야> <창밖에는 비오고요> 등을 부르는 송창식의 노래를 듣고 감탄했다. 송창식의 모든 음반을 구해 들을 만큼 매료된 그는 송창식의 미국진출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도 했다.

정상의 인기는 끊이지 않는 구설수를 동반했다. 루비씨스터즈의 전 멤버 주미옥, 인기정상의 TV 탤런트 한혜숙, 양정화와의 열애설, 홍콩배우 로리타와의 염문설도 그랬고 장사하러 나간다며 가출한 어머니의 느닷없는 등장 등 송창식은 때론 진실이 아닌 헛소문에 시달리며 일거수 일투족이 대중들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75년 8월 '독신으로 살며 음악에만 전념할 것'이라는 선언을 하면서 모든 스캔들의 종지부를 찍었다.

75년은 송창식의 가수인생중 최고의 해. 더욱 대중적인 음악적 변신을 감행했다. 이때 발표한 <고래사냥> <왜불러> <피리부는 사나이> <사랑하는 마음>등은 제10회 MBC10대가수가요제에서 그를 가수왕으로 등극시킬만큼 폭발적 반응을 불러왔다.

그러나 가요정화운동으로 <고래사냥> <왜불러> 정미조가 부른 <불꽃> 등 많은 곡들이 금지족쇄를 차기도 했다.

자작곡으로 발표한 <피리부는 사나이>는 박춘석의 69년곡 <산너머 우리마을>, <사랑하는 마음>은 미국가수 그린 리빙의 의 표절시비에 휘말리며 '너무 상업적으로 변신했다'는 일부 비판이 거세졌다.

송창식은 '75년은 내 음악을 이해해준 분들과 실망한 분들로 양분되어 얻은 것도 많고 잃은 것도 많은 한해였다'고 회고한다. 이후 5번의 예비군훈련 기피 혐의로 입건, 연예협회와 방송윤리위원회로부터 1년간의 방송출연금지를 당하는 아픔을 겪으며 대마초 파동에 연루된 조용필과 함께 은퇴의 사를 내비치기도 했다.

77년 9월 고교동창이자 스튜어디스 출신 쌍둥이 한성숙과의 결혼으로 송창식은 <속 별들의 고향> 영화음악 작곡에 전념을 하며 안정을 찾았다. 이 당시 군에서 제대, 완구공장 창고직원으로 일하다 해고당한 김민기에게 작업실을 거리낌없이 내줘 운동가 '공장의 불빛'을 탄생시킨 일화는 유명하다.

또한 트로트록으로 불렀던 '왜불러'가 79년 일본에서 음반으로 발매됐다. 이후 81년 우리가락에 심취하여 농악과 록을 접목한 <가나다라>를 발표하며 MBC인가가요차트 1위를 4주연속 차지하고 82년 제1회 가톨릭가요대상을 수상하는 저력을 발휘했다.

미성이었던 목소리도 몸 밑바닥에서 우러나오는 한을 표출하기 위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창법으로 변화를 주었다.

단전호흡과 도사상에 빠져들며 화엄사로 들어가 독신수도생활을 시도하기도 했다. 82년 윤형주와 13년만에 트윈폴리오를 재결성, 음반을 발표하며 팬들의 향수를 달래주더니 85년에는 세계적인 가수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에 의해 취입이 추진되었던 공전의 히트곡 <우리는>으로 5회 가톨릭가요대상을 재수상하기도 했다.

요즘 송창식은 서양의 달콤한 곡을 흉내내던 데뷔시절의 음악적 미숙함에서 탈피하여 도가사상과 우리가락에 심취해 자신만의 독특한 음악세계를 구축해 가고 있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

이원근 과학커뮤니케이션연구소장 www.kisco.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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