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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객 송창식님을 좋아하는 사람들
평론&기사

[평론] 전북대 이종민 교수의 '나의 기타 이야기' 론

by 팬더54 2008. 11. 7.

과거로의 아름다운 나들이--[나의 기타이야기]



송창식-나의기타이야기 버전1,2
오리지널곡 송창식['78 Song Chang Sick] B01 나의기타이야기와 
1990년편곡 송창식['90 골든2집]05 나의 기타이야기 연속듣기



옛날 옛날 내가 살던 작은 동네엔 늘 푸른 동산이 하나 있었지
거기엔 오동나무 한 그루하고 같이 놀던 소녀 하나 있었지
넓다란 오동잎이 떨어지면 손바닥 재어보며 함께 웃다가
내 이름 그의 이름 서로서로 온통 나무에 이름 새겨 넣었지
딩동댕 울리는 나의 기타는 나의 지난날의 사랑이야기
아름답고 철모르던 지난날의 슬픈 이야기 딩동댕 딩동댕 울린다

하늘이 유난히도 맑던 어느 날 늘처럼 그녀의 얼굴 바라보다가
그녀 이름 새겨 넣은 오동나무에 그녀 모습 담아보고 싶어졌지
말할 때는 동그란 그녀 입하고 가늘고 길다란 목도 만들고
아- 잘쑥한 허리를 똑같이 만들었을 땐 정말 정말 너무너무 기뻤지
딩동댕 울리는 나의 기타는 나의 지난날의 사랑이야기
아름답고 철모르던 지난날의 슬픈 이야기 딩동댕 딩동댕 울린다

사랑스런 그 모습은 만들었는데 다정한 그 목소리는 어디 담을까
바람 한 줌 잡아 불어넣을까 냇물 소리를 떠다 넣을까
내 가슴 온통 채워버린 목소리 때문에 몇 무릎 몇 손이나 모아졌던가
이루어지지 않는 안타까움에 몇 밤이나 울다가 잠들었던가
딩동댕 울리는 나의 기타는 나의 지난날의 사랑이야기
아름답고 철모르던 지난날의 슬픈 이야기 딩동댕 딩동댕 울린다


어느 날 그녀 목소리에 깨어나 보니 내가 만든 오동나무 소녀 가슴엔
반짝이는 은하수가 흐르고 있었지 하나 둘 여섯 줄기나 흐르고 있었지
오동나무 소녀에 마음 뺏기어 가엾은 나의 소녀는 잊혀진 동안
그녀는 늘 푸른 동산을 떠나 하늘의 은하수가 되었던 거야
딩동댕 울리는 나의 기타는 나의 지난날의 사랑이야기
아름답고 철모르던 지난날의 슬픈 이야기 딩동댕 딩동댕 울린다



참으로 아름다운 한 편의 사랑이야기입니다. 서양에서는 이처럼 하나의 짧은 이야기(스토리)를 담고 있는 시를 발라드(ballad)라 합니다. 우리말로는 담시(譚詩) 혹은 소서사시, 그냥 쉽게 이야기시라 칭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영시 강의시간에 이 독특한 시 장르를 설명하면서 딱, 하고 잡힐 수 있는 예를 든다고 이 노래(시)를 소개하곤 합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반응은 시큰둥하기만 합니다. 이같이 아름다운 사연을 지닌 노래를 알고 있는 학생이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무모한 일이지요? 요즘 젊은이들에게 한물 간 송창식의 노래, 게다가 대표작으로 꼽히지도 못하는 곡을 전형적인 예로 소개하며 이해를 강요하는 게 말입니다. 그러나 어쩝니까? 제 좁은 소견으로는 우리 시(노래)에서 발라드의 가장 적절한 예로 이보다 더 그럴듯한 것이 없으니 말입니다.
 

우리 가요사에 굵직한 획을 그은 송창식. 이제 대중매체의 사냥권에서 멀찍이 벗어나 있는 그를 만나기 위해서는 진짜로 해괴한 곳에 있는 한 카페를 일부러 찾아가야 합니다. 미사리의 [록시]라는 곳입니다. 강변을 따라 수없이 늘어서 있는 카페, 카페, 가든, 가든 그리고 또 카페, 그 입구에는 여지없이 대중가수들의 이름이 어지럽게 널려있습니다. 이제는 이름조차도 가물가물한 가수들로부터 낯설기는 마찬가지인 애송이 가수에 이르기까지. 이곳에 가시면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진풍경과 만나게 됩니다. 강변을 따라 한없이 펼쳐지는 그 아름다운 환상의 드리이브 코스를 세상에서 가장 처참한 꼴로 망가뜨리고 있는 그 수많은 유흥업소들, 그중 하나에 왕년의 가수왕, 숱한 이들의 가슴을 쥐어흔들었던 터벅머리 사나이가 중로의 조금은 초라한 모습을 한 채 추억을 찾는 사람들의 지친 마음을 달래주고 있습니다.
 

청바지와 통기타로 상징되던 70년대 청년문화의 기수, 그의 데뷔모습을 가수 조영남은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쎄시봉 시절, 송창식의 출현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누구나 쎄시봉으로의 출현은 극적일 수밖에 없었으나 송창식의 경우 그 극적 구성이 두드러졌다.
 

홍익대 출신의 명사회자 이상벽으로부터 오늘의 쎄시봉 가수가 소개되었다. '송창식!' 남루하기 짝이 없는 옷차림에 낡은 밤색 군화를 무겁게 끌면서 한 인간이 쎄시봉의 간이무대를 향해 층계를 올라서고 있었다. 기타를 둘러맨 사나이가 허수아비 모양의 팔과 의족처럼 따로 노는 다리를 이끌며 쎄시봉 무대에 올라왔다. 흙 퍼 올리는 기중기의 몸짓으로 기타를 가슴에 끌어안았다. 까닭을 알 수 없는 엷은 미소가 큰 입에 번져 있었다. 그 미소는 영화의 흉악범들이 범죄 직전에 짓는 야릇한 형상의 미소였다. 누가 저 자의 심중을 가히 헤아릴 수 있으랴.
 

기타는 시골 약장수의 것보다 더 낡아 보였다. 긴 손가락으로 마이너 조의 아르페지오를 읊어 나갔다. 한음 한음 신중한 연주였다. 그러다가 청아한 그의 음성이 기타의 선율에 섞여 나왔다. "우나후루 티바 라그리마아---" 참으로 뜻밖의 곡조였다. 오페라 <사랑의 묘약> 중 그 유명한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었다. 오페라 아리아를 오페라 가수답지 않은 평범한 목소리로 그러나 조금치의 품위도 떨어뜨리지 않은 채 끝까지 불러 나갔다. 대한민국 음악사상 오페라 아리아를 자신의 기타 반주에 맞추어 정식으로 관객 앞에 열창해내기는 송창식이 처음이었으리라. 최고의 찬사는 눈물이었다. 쎄시봉 식구들은 다양했다. 실의에 빠진 재수생에서 일류 대학생까지 그리고 무교동 청진동 주변의 이름있는 건달 주먹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쎄시봉의 식구들이 눈물에 젖었다.
 

송창식은 그렇게 시작부터 신비의 사나이였다. 피리를 부는 느낌의 사람이었다."

 현재 미사리 카페촌 최고의 인기가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송창식, 지금도 그의 이름을 들으면 맘 설레는 분이 하나둘이 아닐 것입니다. 저 역시 이번 음악편지를 준비하면서 요즘 계속 그의 노래를 다시 듣고 있습니다만, 가슴 한쪽이 저려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봅니다.
 

'왜 불러!'나 '자 이제 떠나자, 동해바다로!'를 왝 지르며 울분을 토로하던 학창시절의 추억 때문만은 아닌 듯합니다. 저에게는 지금은 중년부인으로 듬직하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제 식구와의 신접살이 시절의 시큼달콤 얼얼한 풍광도 이런 감정의 원인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처음 대학원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이 가수를 더 좋아했던 것은 저였습니다. 아니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 한참 저는 분위기만 잡히면 [새는]이나 [피리 부는 사나이]를 부르곤 했지요. [왜 불러]나 [고래사냥]은 술이 거나해지면 멱따는 소리로 왜장치던 합창용으로 남겨놓고 말입니다. 새나 피리 부는 사나이에 뭔가 심오한, 거창하게 말하면 실존적인, 의미를 찾아 세속을 등진, 내친김에 더 과장을 하자면, '인간은 노력하는 한 헤매느니라'를 외치며 영혼을 저당 잡힌 채 궁극의 진리를 찾아 헤매던 파우스트와 같은, 존재라는 뜻을 부여했었지요. 가당찮게도 스스로를 그런 존재로 자인하며 틈만 나면 눈을 감고 목을 가다듬었지요. (이것은 진짜 사족인데요, 요즘 '새' 가지고 장난치는 막된 풍토가 만연해 있는 것에 막 화가 납니다. 노래 같지도 않은 노래로 우리 모두의 엽기적 분위기에 편승하는 것도 역겹고요.)
 

당시 제 레퍼터리에는 [토함산] [사랑이야] [우리는] 등도 포함되어 있었지요. 물론 제 식구 마음 잡아보겠다고 [꽃보다 귀한 여인]을 한껏 폼잡고 불러 재끼기도 했고요. 웃지 못할 일은, 제 식구가 그때 저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이런 제 노래 아니면 그 분위기에 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지금까지도 조금은 하고 있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제 식구는 제가 그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던 시절에도 이미 그의 열렬한 팬이었습니다.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나팔바지를 펄럭이며 그의 노래를 불러대던 친구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불량배로 몰아치던 '범생이' 시절에도 그녀는 이미 트윈 폴리오 공연 현장을 찾아 분홍빛 첫사랑까지 받쳤던 것입니다.
 

처음, 좋아하는 가수가 같음에 '천생연분'을 반겼던 마음이 이를 확인하는 순간부터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기쁜 마음에 마련한 그의 테이프를 한때는 독수리표 쉐이코 녹음기를 통해 음이 늘어질 때까지 듣곤 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시들해졌습니다. '대중가요 좋아하는 것이 가사 외우게 될 때까지'여서만은 아니었습니다. 뭔가 심기가 뒤틀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속 좁은 사내의 질투라고나 할까요?
 

어찌되었든 저는 그때부터 양희은의 노래를 더 자주 듣고 흥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예 애창곡마저 바꿔버렸습니다. 그 시절 제가 즐겨 부르던 것이 [늙은 군인의 노래] 혹은 [상록수] 아니면 수상한 시절 덕에 이상하게 가사가 바뀐 [금관의 예수] 등입니다. 그것이 제 진해시절, 해군사관학교에서 교관으로 지내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옛날 얘기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의 노래를 제 애창곡으로 온전히 회복하지는 못했습니다. 째째한 질투심 때문은 물론 아닙니다. 이미 오래 전에 밴댕이 속으로 사람을 옭아매던 그 음험한 심기로부터는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말입니다. 심술궂은 분들은 이것이 훌쩍 늙어버린 그의 변해버린 모습을 텔레비전을 통해 확인하고부터 일 거라고 추측하겠지만 말 그대로 억측입니다. 머리카락 듬성듬성하기는 저도 마찬가지인데요 뭐.
 

그의 노래를 즐겨 부르지 못하게 하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노래방 때문입니다. 경험이 있으신 분들은 금방 수긍을 하실 텐데, 그의 노래를 반주기에 맞추어 부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물론 [왜 불러]나 [고래사냥] 정도야 그럭저럭 따라할 수 있지만 그거야 '함께 부르기' 용 아니던가요?  [우리는] 아니면 [사랑이야] 등 분위기가 좀 있다 싶은 곡들은 하나같이 맞춰 부르기가 너무 힘이 듭니다. 제가 반주 없이 즐겨 부르곤 하는 [상아의 노래]만 해도 그렇습니다. 분위기 한참 잡고 있으면 반주기 박자에서 한참 벗어나 있게 마련, 가사 확인하기 위해 잠깐 눈을 떴다가 당황하게 되어 그 뒤는 더욱 엉망이 되고 말지요.
 

저의 비음이 상당히 섞인 발성이 송창식을 닮았다고 제 친구 부인들이 가끔 그의 노래를 주문합니다만 매번 좌절, 절망감만 쌓아가고 있습니다. 내일 모레면 그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되는 데 이번에는 또 어떤 망신을 떨게 될지....
 

저에게는 이래저래 여러 가지로 복잡한 사람입니다. 좋아하지만 그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던 사람. 그 노래에 매료되어 있으면서도 즐겨 따라할 수 없어 매번 좌절감만 심어주는 사람.
 

가수 송창식, 몇 안 되는 진짜 가창력을 지닌 가수, 음악적 재능 못지 않게 뛰어난 시심을 가꾸어온 우리 시대의 진정한 음유시인. 동시대 젊은이들의 상실감과 방황, 힘겹게 지펴온 희망의 불씨까지 끈질기게 대변하고 지켜준 살풀이 무당. 그의 노래를 통해 우리는 젊은 시절의 울분을 달랠 수 있었지요. 그의 중얼거림을 통해 우리는 '나'를 넘어 '우리'의 세상에 눈을 뜨고 사랑을 향한 마음의 문도 열 수 있게 되었지요. 기타 하나 들고 동해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을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참으로 엉뚱한 꿈을 우리는 그 어려운 시절에도 꿀 수 있었지요.
 

오늘 보내드리는 노래에도 개인적인 추억 한 자락이 진하게 베어 있습니다. 제가 전주로 되돌아와 풋내기 교수로 자리를 잡아가던 시절, 그때 저는 고향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하며 여러 곳을 기웃거리고 있었지요. 그래 괜찮은 사람들이 모여있다는 소문이 들리면 어디를 가리지 않고 찾아가곤 했지요.
 

언젠가는 송광사 뒤쪽에 자리하고 있는 '민속주점'인가 무엇인가 하는 곳에 신경림 시인을 비롯한 문학쪽 인사들이 모여있다는 소문과 접하게 되었지요. 자가용이 드물던 시절이라 한 시간 이상을 시내버스를 타고 물어물어 그곳을 찾아갔지요. 당시 한참 민요기행을 하고 다니던 시인과의 시와 민요에 관한 진지한 얘기는 막 마무리가 되고 있었습니다. 어색한 몸짓으로 방문을 열어 젖혔을 때에는. 곧 이어 술판 노래판이 이어졌겠지요. 민요 한 자락, 판소리 한 자락 오락가락 하더니, 이윽고 한 잘 생긴 학생이 자청하여 일어섰습니다. 지금은 어디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있는 이 국문과 학생이 전혀 분위기에 주눅들지 않고 불러 재낀 노래가 바로 이 곡입니다.
 

민요나 단가, 판소리로 이어지는 판에서 다른 종류의 노래를 처음 부른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와 무모함을 필요로 하는 일이지요. 오페라 아리아로 이어지는 판에서 대중가요 들이밀기가 어색한 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을 것입니다. 처음 머쓱해하던 분위기는 청년학도의 열기 어린 노래에 압도되어 갔습니다. 기타도 없이 기타 이야기를 그렇게 황홀하게 부를 수 있다니, 민요 시늉으로, 판소리 흉내로 폼잡던 사람들이 고개를 들지 못하고 술잔만 찾았습니다.
 

사실 저는 송창식 자신의 노래보다 이 젊은이의 열창을 더 좋아합니다. 다시 되새길 수 없어 아쉽지만.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욱 소중하게 여겨지는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불만을 갖고 있습니다. 왜 기타 반주만으로 노래를 하지 않는 것일까? 왜 진부한 비트의 드럼 반주를 이 이야기노래에까지 동반하는 것일까? 송창식의 노래를 들으면서 걸리는 대목입니다. 잘 나가다가 예의 '쿵짝짝 쿵짝'이 거의 예외 없이 끼어드는 것 말입니다. 특히 이 노래의 경우 후반부의 후렴이 영 거슬립니다. 기타 반주만으로도 훨씬 더 어울리는 화음을 조성할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그래도 최근에 다시 부른 것보다는 예전의 것이 괜찮은 듯합니다. 그래 몇 번의 망설임 끝에 젊은 시절 음반에 수록되어 있는 것을 보내드리기로 했습니다.
 

사랑에 모든 것을 걸었던 옛날을 생각하며, 아기자기한 노랫말에 귀를 기울이며 한번 들어보시지요. 아니 이참에 아예 옛날로 돌아가 그의 노래를 줄이어 들어보는 것도 괜찮은 늦여름 나기가 될 것입니다. [피리 부는 사나이]를 잘 부르던 지금은 판사님이 되어 어깨에 상당한 힘이 들어간 선배를 생각하거나, 별 다른 여름 추억도 없으면서 허구한 날 [철지난 바닷가]만 청승맞게 불러대던 대기업 이사가 된 대학 사학년 때 하숙집 친구를 떠올리는 일, 아니면 여주 신륵사 앞 모래사장에서 한 병 소주를 나누어 마시고 취하여 [우리는]을 함께 부르던 여인을 생각해보는 것도 꽤 괜찮은 과거로의 나들이일 것입니다. 김사인 시인이 친구 결혼식에서 축가로 부르던 [사랑이야]나 모언론사 국장님이 되어 지금은 만나기도 어렵게 된 친구가 하숙집 국수파티를 마치고 부르던 [새는]도 저에게는 소중한 추억이 묻어 있는 노래들이랍니다.
 

송창식 노래 관련 사연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리요. 어찌 보면 살아간다는 게 일종의 '추억 만들기'일지도 모르는 것을 한 시절을 풍미했던 그의 노래에 추억 하나 실을 수 없다고 해서야 어디 될 말인가요? 더운 여름날에 대한 추억거리 하나 없이 맞이하게 될 가을의 적막감 같다고나 할까요? 이를 떨치기 위해서라도 지금 무엇인가 찾아 나서야 하겠습니다. 송창식의 노래에 뒤늦게 취해보는 것도 하나의 길이 될 것입니다.
 

시원한 한 줄기 바람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린 여름, 입추라는 말 한마디에 영 맥을 못 추는 늦더위, 그 틈바구니에서 어정쩡하게 감기 걸리지 마시고 한 계절 잘 마무리하시기 바랍니다.
 

2001.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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