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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기사

[평론] 이제 송창식에 대한 기대를 접는다

by 팬더54 2010. 5. 10.

이제 송창식에 대한 기대를 접는다
EBS '스페이스 공감'에 출연, 창작곡 발표 없이 히트곡 재탕에 그쳐  

 
10.04.19 16:35 ㅣ최종 업데이트 10.04.19 16:43  김형찬 (khc61815) 
[출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367265




1991년 대학가요제 송창식-우리는

한국 대중음악의 거장 송창식


지난 4월 12, 13일 EBS의 라이브프로그램 스페이스 공감 개관 6주년 특별기획 '초대' 공연이 본사 공연장에서 열렸다. 이번 출연자는 예상밖의 음악인이어서 필자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의 관심과 기대가 어느 때보다 높았다. 현업에 종사하는 음악관계자들에게 설문을 받아 선정된 거장음악인 송창식이다. 그가 노래하는 모습을 방송을 통해서 가끔 볼 수 있었지만 예상밖이라고 한 이유는 창작 음악을 중심으로 하는 스페이스 공감의 무대에 그가 초대되었기 때문이었다.


우선은 걱정이 앞섰다. 밤 11시에 하루일과를 시작하는 그가 한참 취침중일 시간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주최측에서도 이것을 고려했음인지 시작시간을 30분 늦추었다. 공연장에 입장하니 유독 평론가들의 얼굴이 많이 눈에 띄었다. 그만큼 음악계의 관심이 많았다는 얘기다.
 

객석 또한 다른 풍경이었다. 나이가 지긋한 중년들이 객석을 채운 이채로운 풍경이었다. 과연 그들이 모두 10대1이라는 온라인 신청과 추첨을 어떻게 통과해왔을까 궁금했다. 프로그램 또한 전례가 없었다. 곡목이 아예 비워져 있었고 "공연 중에 즉흥적으로 고른 곡들로 진행됩니다" 하는 안내만 적혀있었다.


주최측에서 처음부터 송창식의 역량과 무게를 고려해서 곡목에 대한 어떠한 논의와 간섭도 요구하지 않고 송창식에게 일임하였다고 한다.


과감하고 실험적인 음반 발표... 퓨전음악의 선구자


송창식이 지난날 거둔 음악의 성과는 화려하다. 1968년 윤형주와 트윈폴리오의 결성으로 한국 통기타 음악의 장을 열었다.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솔로로 전향하여 1974년 <피리부는 사나이>로 TBC 방송가요대상에서 남자가수상과 MBC 10대가수상을 동시에 받음으로써 가요계에 정상에 올랐음을 증명했다.


송창식은 또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1975년 <왜불러>로 가요계의 정상을 계속 유지했고 1975년 말 연예계 대마초 사건으로 인기가수들이 초토화된 가요계에도 살아남아 1976년 말에도 양대 방송국의 가요상을 받음으로써 살아남은 자의 영광을 누렸다.


조용필이 더 이상 가수상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자신의 길을 갔듯이 송창식도 그 이후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과감하고 실험적인 음반과 작품을 발표했다. <토함산> <가나다라> <에이야홍 술래잡기>와 같은 곡들은 전통음악에 대한 고민을 담아낸 곡으로 김민기가 제시했던 전통음악의 현대화라는 화두를 김민기보다 높은 수준에서 보여줌으로써 한국 퓨전음악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와 동시에 <사랑이야> <슬픈 얼굴 짓지 말아요> <우리는> <푸르른 날> 등 대중성과 음악성을 동시에 갖춘 작품으로 대중들의 사랑도 놓치지 않았다. 1987년 <담배가게 아가씨>는 블루스, 국악, 대중음악의 어법이 그의 특유의 해학성 높은 가사와 어우러져 천의무봉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었다.



숨은 내공 엿볼 기회라 기대하며 갔건만...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그 이후 20년이 넘게 그는 새로운 작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미사리의 카페에서 라이브무대에 정기적으로 출연하고 가끔 방송에 얼굴을 내밀어 과거의 히트곡들을 들려주는 소극적인 활동만 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송창식의 음악적 역량을 아는 팬들은 송창식이 더 이상 능력이 없거나 게을러서 안주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역량만으로 본전도 건지기 힘든 현재의 가요계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소모전을 송창식의 스타일상 기피하고 소극적 활동 중에서도 엄청난 내공을 쌓아왔으리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런 음악적 천재를 몰라보고 음반 한 장을 내주겠다는 음반사나 기획자가 나서지 않는 현실을 개탄해왔다. 송창식에 대한 기대의 근거는 그런 것이었다. 다른 무대도 아니고 창작음악의 라이브 무대로 정평이 나있는 스페이스 공감에 초대된 만큼 드디어 송창식의 숨겨둔 내공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들뜬 마음으로 공연장에 갔던 것이다.



더 이상 창작은 없다?


중년들의 박수와 환호속에 송창식은 함춘호와 단둘이 등장하여 "무슨 곡을 듣고 싶으세요" 라는 인사말로 공연을 시작했다. 한국 최고의 세션 기타리스트 함춘호의 느낌대로 손이 움직이는 기타연주는 황홀한 지경이었다. 중간에 게스트로 윤형주가 등장하여 트윈폴리오의 영광을 재현하여 청중들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앞으로 있을 트윈폴리오 공연을 위해 연습중인 <향수>를 새롭게 들려준 점이 이채로웠다. 과거의 향수에 젖고 싶은 중년들의 환호 속에 공연은 끝났지만 평소에 TV에서 보던 음악 외에 다른 모습은 없었다.


윤형주가 농담으로 "여기가 미사리인줄 아나 신청곡을 물어보게" 라고 한 말이 본의 아니게 핵심을 지적한 말이 되었다. 스페이스 공감이라는 무대에서도 과거 히트곡의 재탕에 머문다는 것은 더 이상 창작의 고민은 없다고 볼 수 있다. 가슴 한구석이 무너져 내렸다. 대중음악인은 대중들의 관심과 기대에 부응하는 음악활동과 성과라는 상호작용 속에서 그의 존재가 증명된다. 대가라는 칭송을 받고, 공로상을 받는 음악인이라면 그에 걸맞은 창작활동도 어느 정도는 뒤따라야 할 것이다. 물론 과거의 음악인들이 활동을 펼치기에 현재의 음악계가 만만치 않다는 사실은 감안해야 할 것이다.


이런 한계 속에서도 창작활동을 보여주는 1970년대의 통기타 음악인들도 얼마든지 있다. 비록 자신이 곡을 쓰지는 못하지만 좋은 곡을 받아서 중년의 삶을 노래하여 폭넓은 공감을 얻고 있는 양희은이 있고, 음악이 아닌 뮤지컬로 전향하여 한국형 뮤지컬의 실험이라는 작업을 뚝심있게 진행하고 있는 김민기가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청개구리' 라는 음악무대에서 2세대, 3세대 통기타 음악인들과 함께 하면서 창작곡을 선보였던 김의철이 있고, 비록 음반을 발표하지는 못했지만 지난 해 열렸던 '바람이 불어오는 곳' 이라는 통기타 음악 무대에서 양병집은 당대의 현실을 풍자하는 새로운 곡을 선보임으로써 그의 음악적 결기가 녹슬지 않았음을 보여준 바 있다. 하남석도 지난해 그의 11집 음반을 통해 그의 현재의 음악적 관심과 고민을 보여주었다. 한대수 역시 2008년 11집을 발매하며 살아있는 통기타 음악의 전설로 젊은 음악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이런 음악인들은 경제적인 어려움과 음악계의 냉대 속에서도 힘들게 창작작업을 해오면서 자신이 살아있는 예술가임을 증명하고 있다. 그에 비해 송창식은 음악이 녹슬지 않게 연습할 수 있는 미사리 무대가 있고, 수많은 히트곡이 벌어주는 저작권료 수입이 있으며 여전히 그에게 꽂힌 많은 팬들이 있는데도 여전히 과거의 영광만을 팔고 있는 듯 하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나는 위기의식이 없는 사람입니다"라는 말의 명암


언젠가 송창식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위기의식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대범한 마음이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큰 걸음으로 걸어왔던 송창식의 음악적 업적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내적 성찰에 게을러지는 순간부터 현실에 안주할 수 있는 위험성도 동시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송창식이 갖고 있는 좋은 여건들이 치열한 자기탐구를 하는 예술가보다는 현실에 만족하는 생활인, 대중의 박수를 즐기는 연예인에 머무르는 환경을 조성한 것은 아닐까?


얼마 전에 한국을 방문하여 공연했던 미국 포크의 거장 밥 딜런은 "내 과거의 영광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태도로 청중들을 공연 내내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는 미국 젊은이들의 추앙을 한 몸에 받던 1960년대에도 배신자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고집대로 예술가의 길을 걸었다. 그런 밥딜런은 나이가 들어서도 일관된 예술적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고 청중들은 불편했지만 그의 음악에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무나 쉽게 오를 수 없는 경지임은 틀림없다.

 


송창식이 음악계에서 그런 기대를 받아왔다는 것은 그가 과거에 보여주었던 음악성과 태도로 보건데 그 정도의 그릇은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제 예술가로서 송창식을 마음속에서 지우고 연예인 송창식 정도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그래도 자꾸 미련이 남는다. 부디 죽기 전에라도 저주받은 걸작 한 장이라도 남겨서 이 글이 철없는 평론가의 헛소리가 되기를 마지막으로 소망해본다.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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