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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동아일보의 송창식..

by 팬더54 2008. 11. 11.



[내 마음속의 별]연출가 박근형 ‘영혼의 안식처’ 가수 송창식

가슴 없는 시대, 그 웃음이 그립구나 피리 부는 사나이여!

피리 부는 벌판의 청년 송창식이여!



송창식-가나다라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 에헤헤 으헤 으헤 으허허 일이삼사오육칠팔구하고십이요 에헤헤 으헤 으헤 으허허.’


무슨 노랫말이 랩도 아니고 ‘으헤 으헤 으허허’라니.


영화 ‘25시’에 나오는 앤서니 퀸의 마지막 표정 같은 이 미묘한 노랫말. 도대체 웃는 것인지, 울부짖는 것인지 누가 이토록 무심하면서 처절한 외침의 놀라운 노래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까까머리 중학생 때 텔레비전을 통해 송창식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는 기타를 메고 비 오듯 땀 흘리며 음악에 열중하다가 때론 지그시 눈 감고 두 팔을 벌려 허수아비 몸짓으로 부르던 노래를 몇 박자 쉬 넘기기도 하고 이내 폭풍이 몰아치듯 또 남은 노래를 마저 했다. 자기만의 표정으로 자기 생각을 뿜어 대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 그래서 송창식은 호소력이 있고 사람들은 손뼉 치며 편안해했다.


그의 노래를 듣던 내 가슴은 요동쳤고 이 희한한 가수가 궁금해졌다. 내 속을 다 열어 나를 시원하게 만드는 저 위대한 아티스트는 누굴까. 마치 나를 위해 만든 듯한 노랫말로 로테를 짝사랑하는 베르테르의 심정을 어찌 저리 절절이 표현할 수 있을까. 잠 못 이루는 사랑의 열병과 사랑의 쓰라린 아픔을 어찌 저리 잘 표현하는지. 인간의 얼렁뚱땅 방랑 기질을 어쩜 저리 잘 읽고 노래하는가.


혹시 저 송 씨 형이 6·25전쟁 때 폭격으로 죽었다던 우리 이복형이 아닐까, 어머니께 물어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송창식은 무대에서 자기 맘대로 서 있고 자기 맘대로 춤추었다. 자신의 시를 부드럽게, 때론 소리치듯 자유롭게 낭독하고 있었고 그것은 그만의 노래가 되었다. 나는 송창식의 노래에 빠져 들었고 그가 좋아졌다.


그렇게 몇 번, 몇 년 동안 그가 노래하는 모습을 보던 어느 날, 나는 감은 듯 작은 그의 실눈 속에서 피리를 불며 한가로이 들판을 거니는 한 청년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청년은 장발이고 청바지에 맨발이었다. 청년에겐 철 지난 바닷가 사랑의 쓸쓸한 추억도 있고, 비행을 꿈꾸지만 갈 곳 몰라 방황하는 작은 새의 실존의 덧없음도 있고,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의 숨결을 간직한 청춘의 심장도 있었다. 그러나 청년은 언제나 한결같은 웃음이 있었다.


나는 청년 송창식의 노래가 더 좋아졌고 혹시 송 씨 형이 폭격을 피해 살아남은 내 피붙이 큰형이 아닐까 하는 이런 엉뚱한 생각에 점점 더 깊이 빠져 들었다.


시간이 흐르고, 극단 막내 생활을 하며 어깨너머로 연극 공부를 하고 있을 때 세상이 다 내 것인 양 무서움 모르는 하룻강아지 시절이었다. 아침 일찍 도심에 연극 포스터를 붙이러 나온 나는 국도극장인가 앞에서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 상영 포스터를 보게 되었고 앞뒤 가릴 것 없이 11시 조조영화를 보러 극장에 들어갔다.


타이틀이 깔리고,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내 청춘의 우상 ‘맨발의 피리 부는 청년’을 다시 만났다. 청년은 비틀대며 ‘왜 불러’를 외치다 경찰을 피해 도망치고, 술 취한 채 돋보기안경을 쓰고 ‘고래사냥’을 떠나 자전거에 몸을 싣고 바다로 사라졌다. 나는 그날 극장 안에서 보았다. 느꼈다. 동시대를 살며 내 한 몸 갈피 잡기 힘든 때 홀로 벌판에 서 의연히 바람 맞는 우리의 형님들과 청년들을 보았다. ‘바보들의 행진’은 내게 잊을 수 없는 감동과 충격이었다.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진실은 진실 아닌가.


숨죽이고 말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았던 젊음의 아픔을 담은 영상도 훌륭했지만 소리로만 듣던 송창식의 노래들이 영상과 힘을 더해 오래오래 내게 깊은 자극이 되었다.


그렇다. 송창식의 노래는 휴식이자 용기다. 무엇보다 음악을 모르는 내게 그의 음악은 내 모든 음악의 잣대 중 하나이다. 그리고 송창식, 그가 내 형이라는 확신이 백 프로 들었다. 하지만 나는 인간 송창식을 모른다. 한 번도 그를 만나 인사 나눈 적 없고, 그러니 대화를 한 적은 더더욱 없다. 단지 그의 노래를 듣고 그를 좋아하게 되었을 뿐. 짝사랑 연민으로 벌판에서 피리 부는 그를 상상하고 믿어 왔고 그런 그는 30년 나의 일방적 짝사랑을 무너뜨린 적이 없었다.


나는 송창식의 ‘사랑이야’와 ‘우리는’을 듣고 청춘을 보냈다. 그리고 그 노래를 들으며 사랑을 했다. 나는 그토록 쉽고 절실하며 따뜻한 노래를 들은 적이 없다. 그의 노래는 내 사랑의 향이다.


20대 초반 무전여행을 한답시고 이곳저곳 빈털터리 거지꼴로 다니다가 석굴암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불국사 뒷산 굽이굽이 토함산을 오를 때, 해는 점점 져 오고 가파른 계단은 끝이 없고 나는 쉬며, 포기하며 토함산의 그 돌계단에서 얼마나 다리 풀리며 흔들렸던가. 그때 비틀대며 기진맥진 정신없을 때 송창식의 ‘토함산’을 몇 번이나 불렀던가. 그때 “맨발로 땀 흘려 걸어서 올라라” 그 구절을 얼마나 믿으며, 읊으며, 억지 깡을 부리며 그 계곡을 올랐던가. 그 노랫가락이 없었다면 나는 무엇에 기대고 그 가파른 계단을 올랐을까.

 

 

송창식은 거인이다. 이 좁은 땅, 몇 안 되는 거인 중에 거인이다. 사람들은 술잔을 채우지 못해 안달하지만 그는 잔을 채울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잔을 반쯤 채우고 마시고 싶을 때 느긋하게 한 모금 한다. 그러다 그 잔이 지겨우면 휘익 어디론가 내던진다.


나는 우리의 청년 송창식이 다시 팔 떠억 벌리고 저 경기도 퇴촌 어디를 지나 그 아가씨가 사는 그 담배 가게를 지나 참새와 허수아비가 허물없이 노는 그 논두렁 건너 콩나물 순두부 해장국 파는 우리의 난장판 시장 안에서 “으헤 으헤 으허허” 노래하길 바란다.


언제나 웃는 그의 모습, 허수아비처럼 피리를 들고 우리 모두 바람 따라가는 떠돌이 인생이라는 것을 되새겨 주며 자유롭게 노래하고 맘대로 춤추고 그때 그 거인의 웃음으로….


박근형 연출가

 


■송 씨 “새 앨범? 나올 때 되면 나오겠지요”

 

 

 

“박근형 씨는 나이가 어느 정도 되시는 분이에요?”


연출가 박근형 씨의 원고 내용을 일부 전해 들은 송창식 씨는 박 씨의 나이를 물었다. 송 씨는 자신의 노래 세계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해 준 ‘그’에 대해 많이 궁금해했다. 대학로 연극계의 ‘유명 인사’인 박 씨지만 송 씨는 그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었다. 40세 남짓이라는 이야기를 듣자 “그럼 무언가 말할 수 있는 나이인데…”라며 만족스러워했다.


자신을 ‘나서지 않는 거인’으로 표현한 박 씨의 글에 대해 송 씨는 “표현 자체가 너무 호의적이라 뭐라 말하기 남우세스럽다”면서 “급하지 않은 것뿐이지 항상 다른 사람들이 가진 사회의식을 지니고 살아왔다”고 말했다.


억압적인 유신 시대 분위기를 비판한 영화 ‘바보들의 행진’(1975년)에서 불린 그의 노래 ‘고래사냥’과 ‘왜 불러’는 당시 젊은이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고 1980년대 중반까지 금지곡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송 씨는 당시에 대해 “급하기도 했고 지성적으로 많이 발달된 것도 아니고…, 그렇게 엄청난 추억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시기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면 결혼했다는 것, 그런 정도다”라고 회고했다.


그는 매일 오후 2시에 일어나 많은 시간 노래 연습을 한다. 노래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 내는 연습, 체력 훈련 등을 함께 한다. “노래를 하기 위해서 필요하기 때문”이다.


가요계 복귀 계획은 아직 없다. “늘 마음은 있지만…. 뭔가 모멘트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안 생기네. 1990년대에 가요계가 댄스 위주로 전환되면서 분위기가 어려워졌어요.”


그래도 ‘송창식’이라는 이름 석 자가 지니는 의미는 간단치 않다. “남들은 책임의식 이야기도 많이 하는데 그건 내가 있는 걸로 충분하다고 봐요. 판은 나올 때 되면 나오는 거고, 노래하는 것을 녹슬지 않게 가다듬고 있으니까….”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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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꾼 의견 총 10 개의 의견이 있습니다

010 heeyun1 2007-11-04 09:21:39 0 0
찬성 반대표시를 할 때에도 왜 꼭 로그인을 하게 하는지 참 불편합니다. 더구나 로그인을 한 후에도 글은 작성할 수 있지만 찬성 반대를 누르면 또 로그인하라고 나오고.... 벌써 꽤 오래전 부터 경험한 것입니다. 웹관리자분 참고하십시오.


009 돋보기 2007-11-04 08:20:51 0 0
갑자기 그때 그시절이 그리워진다.암울했던 그시절이지만 그래도 낭만적이고 가슴설레이던 그때를 생각하며 송창식 LP레코드나 한번 돌려보자.


008 kyk2276 2007-11-03 23:32:31 0 0
송창식씨는 노래 부를때 너무 변형을 많이 하시는것 같습니다. 외국의 팝 가수들은 피터폴앤메리,싸이몬과 가펑클 같은 가수들 보면 60이 훨씬 넘은 나이에도 공연할때 보면 그 옛날의 악보 그대로 부릅니다. 분위기도 그대로구요.예전의 느낌을 그대로 느끼게 해주지요. 송창식씨는 노래 부를때 코안의 면적이 점점 넓어지시는것 같구요. 박자도 기교를 많이 부려 좀 그렇습니다. 트윈 폴리오 시절의 그 목소리는 어디로 갔는지 ?????


007 자유분방 2007-11-03 18:42:35 1 0
나에게도 멋진 피리가 하나 쯤 있었으면......


006 dmy0112 2007-11-03 14:57:32 0 0
그리 오래전이 아닌것으로 기억 된다.조선인지 동아인지에 나와서 자기가 부른 노래는 뜻없이 그냥 되는대로 부른다는등.....
아주 팬들을 무시하는 말을 한적이 있는것으로 기억한다,하도송창식을 욕하는 댓글이 많이올라오니 잠시후 그 기사는 슬그머니 없어지더군.나도 그를 참 좋아했던 세대지만 그 글을 본 이후 송자만 나와도 건너뛴다,
제발 대중 을 무시하는 딴따라는 나오지 말아라......


005 phofer 2007-11-03 11:16:00 1 0
나역시 10년넘게 젊은 애들이 판치는 가요계를 먼발치에서 팔장끼고 흥미없이 바라보기만 한다. 어디 송창식 뿐이겠는가마는, 흘러간 세월속에서 그때에 가수와 청중이 어우러져 즐기는 문화의 수준은,질은, 맛은 흥은, 관심은 그 새대를 사는 사람들만의 공통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일진대....그래서 유행가가 아닌가??? 다음 세대에는 또 다른 어떤류의 음악이 청중의 갈채속에 울려퍼질까...?


004 jangsanae 2007-11-03 10:32:05 1 0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양희은...
그리고 그 시대에 음악을 하셨던 많은 음악인들
그 당시 청년들에게 꿈과 희망과 낭만과 자유를 심어주었던
영원한 청년들.. 그립군요. 오늘, 종로에 나가 옛음악이 담긴
음반을 몇개 사야겠어요^^

 

003 jyco0131 2007-11-03 10:09:18 1 0
그야말로 통기타 문화의 산 증인이죠.
""""""""""사춘기때 그의 "한번쯤","상아의 노래", "피리부는 사나이", "딩동댕 지난 여름", "맨 처음 고백"등 저로 하여금 통기타를 입문하게 했던 분.
정말 낭만과 자유를 동경하던 시절에 한줄기 빛으로 다가왔던 문화의 중심에 있던 분.
억압받던 한 시대에 문화를 통해 항변하고 싶어하던, 그래서 불이익도 많이 당했지만, 본인 스스로 인고의 세월을 꿋꿋이 이겨내고 항상 웃음을 잃지 않아 보는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던 분 .
존경합니다.


002 genehlee 2007-11-03 08:26:26 0 0
역시 나만 좋아한 가수는 아니었군요. 하지만 당시의 학생들이나 지성인들이 왜 그렇게 반정부 투쟁에 몰입했는지는 공감이 안갑니다. 학생 때는 공부에 미쳐서 다른 것을 돌아볼 시간이 없었고 졸업 후에는 직장에서 미친듯이 일했고... 유신이 욕먹는 장기집권의 부작용은 있었지만, 당시 반정부주의자들의 우상 김대중이 정권을 잡고 지금의 좌파들이 실세로 자리 잡았더라면 결코 오늘같은 국가건설의 토대는 마련하지 못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민주주의는 생계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하고 지도자는 국력을 집결할 줄 알고 확고한 비전과 국가관을 가지고 있어야 국가가 발전하고 후손에게 남겨줄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사상이나 사회성이 배제된 순수예술가로서의 송창식을 좋아합니다.


001 koreiski 2007-11-03 06:38:03 0 0
나는 피리부는 사나이
바람 따라도는 떠돌이
멋진 피리하나 물고서
언제나 웃는 멋쟁이..
그때가 그립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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