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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객 송창식님을 좋아하는 사람들
평론&기사

[기사] 2002년-다시서는포크음악의전설

by 팬더54 2008. 11. 8.
 

[다시 한 무대에 서는 ꡐ포크음악의 전설ꡑ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ꡒ 30년전 추억을 음악으로 되살려 드립니다 ꡓ



 70년대 포크음악을 이끌었던 포크 빅3 ꡐ트윈 폴리오ꡑ 송창식, 윤형주 그리고 김세환이 다시 한번 뭉친다. 오는 4월26, 27일 양일간 경희대학교 평화의 전당에서 ꡐ포크 빅3 콘서트ꡑ를 여는 것. 이젠 중년의 아저씨가 돼버린 이들이지만 이날 공연에서만큼은 장발에 청바지, 통기타를 치던 그 시절의 청년으로 돌아갈 계획이다. 콘서트 포스터 촬영현장에서 만난 반가운 얼굴, 포크 빅3가 털어놓는, 30여년을 이어온 음악에 대한 열정 & 어느덧 자신이 데뷔했던 나이대의 자녀를 둔 아버지로서 살아가는 요즘 일상.



인터뷰는 밤 10시가 되어서야 이뤄졌다. 밤낮이 바뀐 생활을 30년 이상 하고 있어 밤에 더욱 생생해진다는 송창식(55) 덕분(?)이었다. 이젠 그의 상징이 돼버린 연두색 생활한복을 입고 특유의 너털웃음을 짓는 송창식, 중년의 편안함과 따뜻함이 느껴지는 윤형주(55), 50대라는 나이가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젊은 외모와 감각을 지니고 있는 ꡐ젊은 오빠ꡑ 김세환(54).



어느덧 세월이 흘러 세 사람 모두 나이 쉰이 넘었지만 이날 만난 이들의 모습은 마치 동네 악동들 같았다. 서로 툭툭 치며 장난하고 함께 노래 부르며 추억을 회상하는 모습은 20대 청년의 모습 그 자체였다.



청바지와 통기타, 생맥주로 상징되는 70년대 청년문화에 이들은 신화와도 같은 존재였다. 송창식, 윤형주는 지난 68년 국내 통기타 듀엣의 원조인 ꡐ트윈 폴리오ꡑ를 결성, 가요사상 첫 포크송 번안곡 음반인 <하얀 손수건>을 발표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22개월의 짧은 활동 기간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70년대 청년문화에 끼친 영향을 정말 대단했다. 팀 해체 후에도 송창식은 ꡐ고래사냥ꡑ ꡐ피리부는 사나이ꡑ ꡐ상아의 노래ꡑ 등을 발표하며 포크음악의 대명사로 군림했고, 윤형주 역시 ꡐ두 개의 작은 별ꡑ ꡐ비의 나그네ꡑ 등으로 꾸준히 사랑을 받으면서 오란씨, 롯데검 등 누구나 들으면 알 수 있는 CM송을 무려 1천4백곡 이상 만들었다.



두 사람보다 다소 늦게 데뷔한 ꡐ70년대 청년문화 중 N세대ꡑ 김세환은 ꡐ목장길 따라ꡑ ꡐ좋은 걸 어떻게ꡑ ꡐ사랑하는 마음ꡑ ꡐ길가에 앉아서ꡑ 등 경쾌하고 밝은 포크송으로 특히 여성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은 막을 수 없는 듯 이들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하나 둘 패고 나잇살도 넉넉히 생겼다. 이젠 자신이 가수로 데뷔해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나이보다 더 장성한 자녀를 두고 있는 이들이 중년의 가장으로서, 또 아버지로서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을 털어놓았다.



포크음악의 정수 보여준 괴짜 가수 송창식

ꡒ고등학교 중퇴했지만 게임메이커로 확실하게 자리잡은 아들 결이가 자랑스럽습니다ꡓ



송창식의 라이프 스타일은 다른 사람들과 정반대다. 그는 새벽 5시쯤 잠자리에 든다. 그리고 오후 2시쯤 일어난다. 부인이나 아이들은 물론 그 누구도 오후 6시 이전에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없다. 2시부터 6시까지 네 시간 동안은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그만의 시간이기 때문. 그는 이런 밤낮이 바뀐 생활을 30년이 넘게 해왔다.



ꡒ보통 2시쯤 일어나는데 6시까지는 방 밖으로 나가지를 않아요. 이런저런 생각도 하고 운동도 하거든.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그냥 방에서 빙글빙글 돌아요. 그냥 한두 시간 정신없이 돌거든. 그거 참 좋은 운동이에요. 밖에 나갈 필요도 없고. 이런 생활 때문에 집사람을 하루에 한번도 보지 못해요. 1주일에 두세 번 보나. 허허.ꡓ



6시가 되어서야 슬슬 외출준비를 한다. 그리고 미사리의 카페 ꡐ록시ꡑ에서 공연을 한다. 처음에는 방송이나 대형공연장에서 포크가수들이 설 자리가 줄어들어 서기 시작했던 카페 무대. 하지만 요즘은 다시포크공연이 활성화됐는데도 그만둘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가 그만두면 카페의 영업이 되지 않을 정도로 송창식 마니아들이 고정적으로 찾고 있기 때문. 인터뷰를 하던 날도 그는 미사리 카페에서 공연을 마치고 왔다.



송창식은 아내 한성숙씨 그리고 결, 무늬, 빛터 세 자녀들과 함께 경기도 광주의 전원주택에서 살고 있다. 아내는 비즈니스우먼. ꡒ어떤 사업을 하냐ꡓ는 질문에 그는 황당하게도 ꡒ몰라ꡓ라고 대답했다.



ꡒ집사람은 무슨 비즈니스 쪽에 관여를 하고 있는데 자세히는 몰라요. 나는 사업 같은 것에 관심조차 없거든. 아마 굉장히 중요한 비즈니스일 거예요. 우리 집사람은 보통 여자가 아니거든. 자기 캐릭터가 확실한 여장부야. 우린 완전히 생활의 패턴이 갈렸어요. 일어나서 활동하는 시간도 다르고. 그래도 멋진 집사람 덕분에 음악을 계속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어(웃음).ꡓ



장남 송결씨는 스물네살의 건장한 청년이다. 그의 최종학력은 고등학교 중퇴.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 교육이 의미가 없다며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ꡒ황당하기야 했지. 하지만 아들의 판단인데 무슨 권리로 막을 수 있겠어요. 당시는 좀 불안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학교를 그만둔 것이 아들에게 좋은 일이었다고 생각해요. 학교를 그만둔 후 평소 그렇게 좋아하던 게임에 매달리더니 아예 게임을 만들기 시작하더군. 우리 아들 이제 꽤 유명한 게임메이커예요(웃음).ꡓ



어릴 적에는 노래를 곧잘 불렀지만 음악쪽에는 관심조차 없다고 한다. 아들이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 그가 ꡒ가수가 될 생각 없냐ꡓ고 물었지만 아들은 ꡒ노래는 아버지대에서 끝내세요ꡓ라고 단호히 말했다고.



둘째 딸 무늬양은 패션 전문학원에서 패션디자인을 공부하고 있다. 그녀 역시 대학진학을 보류했다. 대학보다는 패션디자인 실무를 익히고 싶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 자녀 모두 자유분방한 아버지의 성향에 영향을 받아서일까. 일반적 기준에서는 다소 벗어난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자기가 선택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아버지 송창식도 그런 아이들이 자랑스러울 뿐이다.



ꡒ결이는 컴퓨터 게임을 하면서 일본말을 완벽하게 배웠더군. 참 지난해에 일본어 능력시험을 봤는데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1급에 붙었어요. 일본사람보다도 일본어를 더 잘해요. 인터넷 사이트에 게임 시나리오를 일본어로 올렸는데 일본기업에서 채택했다는 거 아냐. 물론 일본인이 만든 걸로 알았다고 해요. 셋째 빛터도 이제 중학교 3학년이 됐는데 형 따라서 게임을 하더니 2급에 붙었더라고. 대단하지 않아요? 허허.ꡓ



작곡에서 손을 뗀 지 10년이 지났다는 송창식. 책상 앞에 앉아서 새로운 음반을 내려고 서너번쯤 노력해 봤는데 ꡐ재미ꡑ가 없었다고. 그는 ꡒ우리는 사실 20만장을 목표로 음반을 만드는데, 요즘 20만장은 별거 아닌 걸로 생각해 자존심이 좀 상해서ꡓ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는 지금까지 한국적인 정서와 혼을 가장 호소력 있게 전달해온 음악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ꡒ아이들이 자신을 존경하는 것은 단지 음악을 해서가 아니라 ꡐ좋은ꡑ 음악을 하기 때문ꡓ이라고 당당히 말하는 송창식. 그의 새로운 음악을 들을 수 있는지 여부는 아마도 대중의 손에 달려있을 것 같다.



사업가, 선교사, 사회사업가로서 바쁘게 살아가는 윤형주

ꡒ2003년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가족 콘서트를 열 계획입니다ꡓ



70년대에 동네오빠와 같은 친근한 외모와 경쾌하고 서정적인 노래로 여성들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던 윤형주. 30여년이 지난 지금 그는 3남매의 아버지, 공연기획과 광고음악 제작 등을 주로 하는 ꡐ한빛기획ꡑ의 대표, 기독교 장로, 사회사업가 그리고 음악인으로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ꡒ외국에 많이 나가는 편이에요. 사업문제나 교민단체, 한인방송의 초청공연, 선교활동 등으로요. 그래서 아내와 1년에 서너달은 떨어져 살아요. 아내에게는 정말 미안하죠. 대신 1년에 한번은 함께 외국여행을 떠나요. 캐나다와 오스트리아에서 공부하는 두 딸을 만나기도 하고 단순히 관광을 하기도 하고요. 그러면서 이야기도 나누고 정도 돈독히 쌓아갑니다.ꡓ



윤형주는 미사리 카페촌 등의 업소에서는 노래하지 않는다. 대신 불우청소년을 위한 자선공연, 재소자와 장애인 등을 위한 모금공연에 가면 그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그는 가스펠 공연도 많이 하는 편. 그동안 크리스마스 캐럴을 비롯해 여러 장의 가스펠 음반을 발표했다.



ꡒ저희 집 가훈은 ꡐ하나님 사랑, 나라 사랑ꡑ입니다. 그래서 저희 집안에서 윤동주 시인 같은 분이 나온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윤형주와 고 윤동주 시인은 6촌간이다). 저도 하나님 사랑을 알리기 위해 선교활동을 하는 것이고, 나라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겁니다. 그렇기에 제가 대단한 일을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제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죠.ꡓ



이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일까. 세 자녀 또한 독실한 크리스천이고 별다른 일탈 없이 반듯하게 자라왔다. ꡒ어떤 아버지냐ꡓ고 물었더니 윤형주는 ꡒ아이들에게 벗어나지 말아야 할 울타리를 만들어주는 아버지ꡓ라고 대답한다. 즉 울타리 안에서는 자녀들이 모든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지만 그 울타리를 넘어서는 안된다는 것. 아이들도 처음에는 답답해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나면 인생의 선배인 아버지가 옳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ꡒ사람들은 제가 여러가지 일을 하며 바쁘게 살아가는 것을 보고 ꡐ어떤 일이 가장 힘드냐ꡑ고 묻곤 해요. 그러면 저는 거리낌 없이 바로 ꡐ아버지ꡑ라고 대답합니다. 아버지라는 직업은 영원히 끝나지도 않고 하기 싫다고 사표를 낼 수도 없는 것이잖아요. 또 자식이라는 결과물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죠.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힘든 것이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라는 ꡐ직업ꡑ 같습니다.ꡓ



2년 전 결혼한 큰딸 선명씨(28)는 캐나다에서 뮤지컬 작곡을 공부하고 있고, 둘째딸 선영씨(27)는 오스트리아에서 성악을 배운다. 미국 보스턴에서 경영학을 공부하던 막내 아들 희원씨(24)는 현재 육군 병장으로 군복무중.



ꡒ요즘 아이들은 외국에서 공부하면서 어떻게든 군대에 안 가려고 하잖아요. 저도 아들이 그런 생각을 할까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희원이는 오히려 ꡐ한국 남자면 당연히 가야 하는 게 아니냐ꡑ며 대학을 휴학하고 군입대를 자청했습니다. 제 아들이지만 정말 자랑스럽더군요. 희원이가 제대하면 다음해 5월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저희 가족 모두가 참여하는 ꡐ가족 콘서트ꡑ를 열 계획입니다.ꡓ



첫째 선명씨가 작곡한 노래를 둘째 선영씨가 부르거나 기타가 취미인 아들과 윤형주가 함께 무대에 오르기도 하고, 윤형주의 히트곡을 가족 모두가 부를 예정. 클래식과 포크의 퓨전 공연이 될 ꡐ가족 콘서트ꡑ만 생각하면 벌써부터 잠을 설칠 정도로 설렌다고 한다.



윤형주는 이번 포크 빅3 콘서트를 마친 후 새 음반을 낼 계획이다. ꡒ음반에 담을 노래를 작곡하려면 더욱 바빠질 것 같다ꡓ며 그는 허허 웃었다. 사실 윤형주는 30여년 동안 작곡활동을 꾸준히 계속해왔다. 하지만 그가 만든 노래를 직접 부르는 것은 실로 오래간만의 일. ꡒ제 음반이 중장년층을 위로하고 보듬어줄 수 있는 선물이 되길 바랍니다ꡓ라는 그의 작은 소망이 이뤄지길 기대해본다.



영원한 젊은오빠 김세환

ꡒ아이디, 노땅카수. 프리챌, MSN 등에서 채팅하는 재미에 푹 빠져있습니다ꡓ



보통 ꡐ10년은 젊어 보인다ꡑ는 말은 쓴다. 하지만 김세환의 경우 ꡐ20년은 젊어 보인다ꡑ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50대 중반이지만 그의 외모와 체격은 잘하면 30대 처럼도 보인다. 환한 미소와 재치 넘치는 말투도 여전했다. ꡒ요즘 어떻게 지내냐ꡓ고 물으니 그는 대뜸 ꡒ채팅하느라 정신이 없다ꡓ고 대답했다.



ꡒ주로 프리챌에서 활동해요. 아이디는 노땅카수고요. 사실 촬영하러 오기 전에도 채팅을 했는데 글쎄 대화방에 만난 사람이 ꡐ내가 김세환ꡑ이라고 해도 안 믿는 거예요. 오히려 ꡐ네가 김세환이면 난 김건모다ꡑ라고 말하는 거 있죠? 장난치면 퇴장시켜 버릴 거라고 했는데 계속 김세환이라고 주장했더니 진짜 강퇴(강제퇴장)시켜 버리더군(웃음).ꡓ



항상 새로운 일에 도전하기를 좋아하는 김세환이 이번에는 N세대 필수인 채팅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이런 마음가짐 때문인지 김세환은 노래는 물론 사진 및 비디오 촬영, 스키, 산악자전거 등 즐겨 하는 일이 상당히 많다. 그리고 거의 모든 분야에서 아마추어 이상의 실력을 보여준다. 사진촬영의 경우 그가 찍은 사진이 한 백화점 가족사진 콘테스트에서 1등을 차지했고, 외국의 한 동물원에서 촬영한 ꡐ오랑우탄쇼ꡑ는 KBS <퀴즈 탐험 신비의 세계>를 통해 별다른 편집 없이 방영됐을 정도다. 스키는 리프트가 없어 장비를 들고 올라가야 했던 70년대부터 타기 시작해 현재 연예인 중 최고의 실력을 자랑한다. 요즘은 15년 전부터 시작한 산악자전거를 타며 체력을 다지고 있다.



ꡒ산악자전거는 말 그대로 자전거로 등산을 하는 거예요. 며칠 전에도 우면산에 다녀왔는데 넘어져서 무릎이 다 까졌어요. 보통 이문세, 김창완, 이용식 같은 친구들과 함께 가죠. 사실 아들, 딸도 데려가고 싶은데 젊은 녀석들이 저보다도 부실해요. 못 따라 올라와요.ꡓ



김세환은 아들 기범씨(22)와 딸 도연씨(20)의 친구 같은 아버지이기도 하다. 아들 기범씨는 미국 유학중이고 바순을 전공하는 딸 도연씨는 중앙대학교에 재학중. 그는 지갑 속에 항상 가족사진을 가지고 다니는데, 사진을 보니 환하게 웃고 있는 두 자녀 모두 김세환을 쏙 빼닮았다. 특히 기범씨는 젊은 시절 김세환의 해맑은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ꡒ요즘 딸아이가 대학에 가더니 이젠 아버지를 ꡐ꼰대ꡑ로 알아요. 아주 무시하며 안 놀아줘. 사실 저도 그렇고 집사람도 그렇고, 엄마 아빠 같지 않아요. 그냥 우리 네 가족 모두가 친구 같아요. 하긴 저도 그렇게 자랐거든요. 전 고등학교 3학년 때 부모님 허락받고 우리집에서 댄스파티를 하기도 했어요. 제가 자유분방하게 커서 그런지 아이들에게 제 생각을 강요하거나 권위적으로 행동하지 않아요. 사실 다른 부모들은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보려고 노력한다는데, 전 노력하지 않아도 제 눈높이가 아이들과 비슷하거든요(웃음).ꡓ



현재 그의 주업은 가수로서 무대에 서는 것이다. 예전에 몇몇 사업을 해보기도 했지만 맞지 않아 번번이 금방 그만뒀다. 김세환은 경기도 미사리 카페촌 등지는 물론 지방무대에도 많이 선다. ꡒ불러주면 다 가는 편ꡓ이라며 쑥스러운 듯 웃지만 노래에 대한 열정은 젊은 시절과 다름없음이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이번 콘서트를 앞둔 각오도 남다르다.



ꡒ다들 제 음반을 산다고는 하지 않고 ꡐ음반 하나만 달라ꡑ고 해요. 사실 요즘 아이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의 새 음반이 나오면 줄을 서서라도 사지만 아줌마, 아저씨들이야 그런가요? 그런데 2년 전에 있었던 포크 빅4 공연에 정말 많은 관객들이 온 것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40, 50대도 열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감춰놓았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죠. 우리가 그런 열정을 이끌어내고 싶습니다.ꡓ



현재 그는 두개의 음반을 준비하고 있다. 하나는 독실한 크리스천인 그가 부른 가스펠 음반. 팝적인 요소가 가미돼 경쾌하고 따라 부르기 쉽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또 하나는 그의 새로운 음반. 일본의 유명 포크 작곡가에게 곡을 받았다는 김세환은 새 음반에 40, 50대들이 좋아하고 즐길 만한 포크음악을 주로 실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번 빅3 공연과 그의 새 음반으로 인해 중장년층 문화가 더욱 활성화되고 젊어지길 기대해 본다.



[포크 빅3와 료코의 캠퍼스 콘서트]



이번 콘서트 정식 명칭은 <포크 BIG3와 료코의 캠퍼스 콘서트>다. 2002 한일 월드컵을 기념하는 한일 합작 콘서트로 빅3 외에도 일본의 대표적인 여가수 모리야마 료코가 출연한다. 그녀는 일본 포크음악의 선구자로 불리며 현재까지 2천회 이상의 공연을 했고, 지난 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 테마송을 불러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도 했다.



콘서트에서 이들은 자신의 히트곡은 물론 70년대 추억과 낭만을 불러일으킬 주옥 같은 외국곡들도 부를 예정. 특히 콘서트 중간에 깜짝 이벤트로 진행될 계획인 ꡐ빅3와 함께 떠나는 추억의 음악다방ꡑ은 입장시 듣고 싶은 곡과 사연을 적어 내면 추첨을 통해 신청곡을 즉석에서 들을 수 있는 코너. 옛날 음악다방의 추억을 되살려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생생토크]



ꡒ나이 먹었네 하며 권위적으로 변해가는 친구들 보면 참 안타까워ꡓ



50대 중반의 나이에도 젊은이 못지않은 열정으로 살아가고 있는 포크 빅3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세명이 모이면 정말 타임머신을 타고 30년 전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고 한다. 포스터 촬영을 마치고 식사를 하며 나눈 이들 3명의 생생한 이야기를 지면에 담았다.



윤형주(이하 윤) : 우리 직접 만난 건 오래간만이지 아마. 전화는 해도 자주 만나지도 못해. 워낙 창식이의 생활패턴이 남달라서.



송창식(이하 송) : 그래서 밤낮이 바뀐 생활을 30년 넘게 하고 있어. 절대 바꾸지 못해(웃음). 이젠 늙어서 그런지 사진촬영도 참 힘드네. 정말.



김세환(이하 김) : 우리도, 팬들도 다 나이가 들었지. 아줌마가 뭐야. 손주 본 할머니들도 있을 걸. 예전에는 ꡐ어머, 김세환씨죠?ꡑ라고 했던 팬들이 이젠 ꡐ혹시 김세환씨 맞나요?ꡑ라고 의심스럽다는 듯이 물어. ꡐ맞다ꡑ고 하면 꼭 이렇게 말하지. ꡐ어머, 예전에 참 많이 좋아했었어요ꡑ라고. 항상 난 ꡐ그럼, 지금은 안 좋아해요?ꡑ라고 되물어(웃음).



윤: 난 요즘 큰일이야. 계속 살이 찌고 있어. 한 7, 8kg 정도 찐 것 같아. 살 빼려고 헬스클럽에 다니고 식사량도 줄이고 있어. 어휴. 내가 먹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송: 살을 왜 빼. 다 나이가 들면 찌는 나잇살인데, 뭘.



윤: 그러고보면 젊었을 때는 참 날씬했는데 말이야. 그땐 참 인기도 좋았어. 요즘 god 같은 친구들보다도 훨씬 인기가 많았을 걸. 당시 최고의 데이트 코스는 우리(트윈폴리오)가 공연하는 OBꡑs 캐빈에 데리고 오는 거였잖아. 다들 새 학기가 되면 카페로 몰려오곤 했지. 그때가 돈이 많거든. 등록금에, 책값에. 허허. 그래서 미팅을 해서 마음에 들면 여자를 데리고 왔는데 여자들이 어떻게 했겠어. ꡐ어머머, 송창식 윤형주ꡑ 그러며 우리에게 정신을 팔고 있었지.



송: 그때 싸움도 나고 그랬었잖아. 여자들이 우리만 쳐다보니까 남자들이 시비도 걸고 그랬어. 욕을 하기도 했고. 그럼 우리는 샹송을 부를 때 가사 대신에 욕을 한 적도 있었지. 혀를 굴려 욕을 하면 마치 불어처럼 들렸거든. 다들 황홀해하는 눈으로 쳐다보는 관객들에게 욕도 했으니 그땐 참 어렸어. 그래도 재미는 있었는데. 우리가 듀엣으로 활동한 게 아마 1년 10개월밖에 안됐지. 참 고마워. 그 짧은 기간 활동했는데도 우리를 기억해 주는 사람이 많은 걸 보면.



김: 그땐 참 잘 나갔었어. 윤석화 있잖아. 석화가 내 팬이었잖아. 고등학교 시절 우리 집앞에서 나를 기다리곤 했었는데. 그래서 내가 ꡐ집에 가, 공부해야지ꡑ라고 말해주곤 했어. 그때 참 고운 소녀였는데. 흐르는 세월은 막을 수 없나 봐.



윤: 유성이(전유성)도 그래. 유성이가 우리 참 많이 따랐었는데. 심부름을 도맡아 했었잖아. 이젠 개그계의 대부가 됐어. 생각해 보면 유성이의 개그는 참 많이 앞서갔던 것 같아. 그때 했던 개그들이 지금 들어보면 참 웃기거든.



송: 우리도 나이가 참 많이 들었지. 이젠 가요무대에 설 나이라니까. 그렇지 않아? 사실 조영남, 이미자, 패티김 다음이 우리지 뭐.



윤: 가요무대의 사회를 봤던 김동건 아나운서가 나한테 그랬어. 다른 가수들은 가요무대에서 다른 사람의 노래를 불러야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노래를 부르면 된다고. 처음에는 좋은 소린가 했는데 그만큼 우리가 오래됐다는 이야기 아냐?



김: 이젠 우리보고 다들 선생님이래. 왜 선생님이야? 내가 뭘 가르쳤나? 방송에서도 그러고.



윤: 마땅히 부를 호칭이 없잖아.



김: 사실 우리도 20, 30대 때 40, 50대를 보면 정말 달라보였는데 막상 그 나이가 되니까 그게 아니야. 그냥 자연스럽게 세월이 흘러 나이를 먹은 것일 뿐 무언가 엄청나게 달라진 것이 아니라고. 60, 70 나이를 먹어도 아마 똑같을 걸. 주변 친구들이 나이 많이 먹었네 하면서 새로운 시도도 하지 않고 권위적으로 변하는 것을 보면 많이 안타까워. 지금도 새롭게 배우고 도전할 것이 얼마나 많은데. 요즘 난 프리챌 커뮤니티인 가요사랑방 사람들과 계속 온라인, 오프라인 상으로 만나고 있어. 참 신기해. 온라인으로 홍보도 하고. 나 곧 새 음반 나오잖아(웃음). 늙었다고 단념하기엔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많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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